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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노트 · 석유와 냉전

「냉전기 미국의 대소 인식과 중동 정책: 서유럽 석유 공급 문제를 중심으로」

이정하, 「냉전기 미국의 대소 인식과 중동 정책: 서유럽 석유 공급 문제를 중심으로」, 『史叢(사총)』 117호, 2026.
1. 서론 2. 봉쇄 전략의 논리와 마셜계획 3. 소련의 대중동 정책에 대한 미국의 인식: 트루먼에서 레이건까지 4.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성’에서 ‘이해관계의 차등성’으로 5. 결론
<초록> 본고는 석유 문제와 전후 서유럽의 에너지 전환이 초래한 전략적 함의를 중심으로, 미국의 냉전 전략을 소위 ‘방어적 봉쇄전략’으로 보는 시각을 재검토하고, 냉전 시기 서유럽과 중동 지역이 미국의 전략에서 각각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해본다. 전후 서유럽 재건을 둘러싼 에너지 문제, 즉 유럽의 중동산 석유 의존이 미국의 대중동 정책과 대소 인식틀을 어떻게 형성했는지가 주된 내용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정책, 미국 외교문서(FRUS), 정보 분석 보고서 등을 토대로, 마셜계획과 개방적 국제 경제 질서 구축이라는 거시적 기조가 유럽 에너지 소비의 석유 의존과 어떻게 맞물렸는지 살펴본다. 미국은 마셜계획을 통해 서유럽의 물류 체계를 석탄 중심의 철도에서 석유 중심의 도로 운송으로 전환하도록 압박했으며, 이로 인해 서유럽의 석유 소비 비중은 1950년 15% 미만에서 1973년 60%까지 급증했다. 이러한 인위적인 에너지 전환은 서유럽이 중동산 석유에 생존을 의존하게 되는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미국 정책 결정자들에게 중동 내 자국의 이해관계를 필수불가결한 긍정적 이익으로, 소련의 이해관계를 단순한 방해 목적의 부정적 이익으로 인식하게 하는 ‘이해관계의 차등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1980년 카터 독트린과 1983년 미 중부사령부(CENTCOM) 창설을 통해 중동에 대한 직접적 군사개입이 제도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본고는 유럽의 석유 의존도가 단순한 주변적 경제 변수가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인식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음을 밝힌다. 유럽의 에너지 취약성이 역내 이해관계의 차등성이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동에서의 공세적 군사개입을 필연적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1. 서론

냉전 기간 내 미국 중동 정책 특징

  •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 “1945년 이후 워싱턴의 세계 전략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었다”고 규정
  • 미국 정책 결정자들: 자신의 행동은 소련의 “여러 다양한 형태의 도전에 대한 전방위적 대응/ 방어”로 인식
  • 냉전 시기 미국의 대유럽 정책: 유럽의 석유 의존성 심화, 석유 공급원으로서 중동의 역할 규정
  • 결론적으로 적극적 군사개입을 불러오는 구도 형성
  • 문제: 처음부터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이 존재햇음
  • 동유럽은 소련산 자원 공급, 서유럽은 페르시아만 지역의 석유 공급에 의존
  • 소련이 자체 자원을 동맹국에 제공한 반면, 미국은 자원에 대한 접근을 외부에서 확보해야 했음
  • 이러한 구조는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의 중동 정책을 규정지음
  • 궁극적으로 1980년 카터 독트린과 1983년 미국의 적극적 군사개입을 상징하는 미 중부사령부(USCENTCOM)의 창설로 정점에 달했음
  • 중동 석유는 유럽 재건을 위한 미국 전략의 결정적 요소
  • 1940년대 이후 미국이 대유럽 원유 공급로를 보호 - 대중동 정책의 핵심 사항
  • 1950년 서유럽의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미만
  • 1960년에는 30%를 넘어섬
  • 제1차 석유 파동 직전인 1973년에 는 60%에 이름
  •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석유의 23%를 중동에서 조달했고, 나머지 약 75%는 서반구, 즉 미국・베네수엘 라・카리브 해 지역에서 공급받았음
  •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석유 생산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자국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중동의 석유 증산을 장려하고, 수요를 중동 석유로 충당하도록 유도.
  • 마셜 계획(Mashall Plan)이 시행되던 시기, 미국은 유럽 정책에서 석유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음
  • 1948~1951년 사이 전체 원조액의 10%를 상회하는 약 12억 달러가 석유 구매 자금으로 배정됨
  • 마셜계획 달러가 유럽 중동산 석유 공급을 보장해줌으로써 미국 석유 기업들이 유럽 시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줌
  • 이전까지 유지되던 운송 네트워크 자체가 미국 기업에 유리하게 재편됨
  • 마셜계획 초기: 유럽 석유 수입에서 중동산이 차지하는 비중 43%
  • 1953년, 93%로 급중
  • 제2차 석유 파동(1979), 유럽 각국 석유 수요 50~75% 중동산 석유에 의존
  • but 소련은 보유 자원을 활용해 동맹국들의 수요 충당
  • 전쟁 직후 소련의 석유 산업은 붕괴 직전
  • 1953년까지 루마니아산 원유와 폴란드산 석탄 수입에 의존하기도 함
  • 1946년 이란 위기 당시 스탈린이 보인 행보: 석유 부족에 대한 우려도 많은 동기 중 하나
  • 1953년 기점으로 소련의 석유 산업 회복세로, 수출도 재개
  • 수출량: 1953년 420만 톤 -> 15년간 폭발적 증가 1968년 8,600만 톤 육박
  • 이 시점부터 소련은 동맹국 대부분에 석유 공급
  • 1960년대 초반에는 대서방 수출도 시작
  • 아이슬란드, 핀란드, 스웨덴, 그리스, 오스트리아의 경우 에너지 수요의 상당 부분 or 전량을 소련에 의존
  • 1960년대 모스크바 주도 하에 에너지 집약형 산업 육성 - 동유럽 국가들 석유 소비량 급증
  • 1970년대: 동유럽 국가 소비량 두 배 증가, 전체 수요 77% 이상 소련산
  • '유럽에서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 = 미국이 소련에 대한 '유럽에서의 이해관계의 차등성'
  • 이러한 차등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인식이 봉쇄전략, 개입의 정당성을 제공
  • 미국의 대중동 정책 규정하는 핵심 요소
  • 냉전 기간 내내 미국 정책 결정자들은 서유럽이 중동산 석유에 의존하는 구조를 심각한 전략적 취약점으로 간주
  • 소련이 대서양 동맹 와해시킬 수 있다는 우려
  • 1947년 미국 상원의원 오언 브르스터(Ralph O. Brewster): “중동의 석유 밸브를 장악하는 자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하게 될 것”
  • 미국이 인식한 '소련의 정책 목표'
  • 단순히 동구권의 에너지 수요 필요 충족
  • 역내 석유 통제권 확보 - 미국, 유럽 동맹국들을 압박할 전략적 레버리지로 활용
  • 이는 소련이 석유 공급을 중단하거나 공급지로서 중동을 대체함
  • 미국의 최우선 목표였던 서유럽의 산업 및 경제 발전을 멈추게 할 수 있고
  • 유럽을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소련산 석유에 의존토록 만들 수 있음을 의미
  • 이러한 맥락에서 소련은 중동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negative) 이익, 즉 거부적(denial) 이해관계를 가진 것으로 판단
  • 자국의 이익을 소련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것으로 정당화하고 인식하는 태도
  • 1970년대 들어 소련의 자체 석유 매장량이 고갈되어 가고 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외부 공급원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각종 보고

논문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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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바, 유럽의 석유 수요 문제: 중동 내 미국의 유일한 핵심 이익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주요한 이익 중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는 점
  • 로버트 비탈리스(Robert Vitalis): 원활한 석유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적극적 개입과 힘이 필수적이라는 미국의 믿음이, 석유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오해와 소련의 위협에 대한 과장된 인식에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
  • 즉, 석유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포는 비합리적인 것
  •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이라는 관점에서, 서유럽의 대소 봉쇄 전략이 미국의 중동 정책을 어떻게 구체화했는지 살펴봄
  • 첫째, 서유럽의 석유 수요가 급증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 데이비드 페인터 (David S. Painter): 석유 수요의 급증 더 정확히는 ‘에너지 전환’의 원 인을, 유럽이 자동차를 “고도의 석유 사용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사회경 제적 조직 양식”의 중심에 놓게 되면서 발생했다고 본다.
  • 유럽 자동차 산업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이러한 흐름의 한 측면일 뿐이지만, 마셜계획 을 둘러싼 연구들은 전반적으로 도로 운송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도록 압 박한, 즉 유럽의 철도 중심 물류 체계를 트럭 및 자동차 중심의 도로 운송 체계로 전환하도록 압박한 미국의 정책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한다.
  • 둘째, 냉전 기간 서유럽의 석유 소비가 미국의 중동 정책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가?
  • 미국의 중동 정책에는 전략적 요충지 확보, 동맹국으로서 영국의 영향력 유지, 이스라엘 방위와 같은 여타의 목적도 존재
  • 전후 발생한 중동 위기 국면에서 서유 럽에 대한 원유 공급 문제는 미국의 최우선 안보 고려사항이었음
  • 이는 국이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성’에 근거하여 중동 지역 내 미국과 소련 간의 ‘차등적 이해관계’라는 인식틀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중동 석유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카터 독트린과 CENTCOM 창설의 핵심적인 ‘인식’ 배경이 됨

2. 봉쇄 전략의 논리와 마셜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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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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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 초기부터 미국은 개방된 세계 무역 체제를 지향
  • 1940년대 초 미 외교관들은 개방적 국제 질서를 통해 평화를 달성하려는 '윌슨주의적 기획'에 강한 영향
  • 폐쇄적 경제 블록이 대공황과 전쟁을 유발했다는 과거의 경험 -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공고히함
  • 이러한 세계관은 봉쇄 전략의 기저를 이룸
  • 서유럽, 일본을 미국이 주도하는 무역 체제에 편입시킨다는 목표에 입각한 것
  • 전후 유라시아의 핵심 산업 지대를 장악하려는 소련을 저지한다는 의미이기도 함
  • 만약 소련이 해당 지역을 장악할 경우, 미 본토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대규모 상륙전 수행 능력 등 막대한 군사적 잠재력을 확보하게 될 것
  • 1945년 이후 서유럽 산업 지대가 직면한 또다른 위협: 극심한 경제난, 전쟁 공포로 인한 대중의 사기 저하
  • 이로 이한 공산주의 세력의 전복 활동, 선거를 통한 집권 시도에 취약해지는 것
  • 유럽의 '심리적 취약성'의 극복은 유럽에서의 봉쇄 전략이 겨냥한 또다른 목표이기도 함
  • 유럽의 안보와 번영은 곧 미국의 안보와 번영
  • 자금을 달러로 제공하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과 자유무역을 촉진함으로써 유럽 재건을 지원하고자 했던 마셜 계획의 기본 전제가 됨

서유럽의 에너지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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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너지: 생산성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
  • 전후 서유럽 국가들은 최악의 에너지 위기에 직면함.
  • 석탄 부족은 경제 재건과 사회적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함.
  • 마셜 계획 입안자들에게 석탄 부족 사태는 유럽 재건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 1939년 기준: 서유럽 에너지 공급의 90%를 석탄이 담당했음. 마셜 계획 개시 시점에는 새로운 에너지원으론의 전환이 필수적임.
  • 1954년 여름: 유럽 경제협력위원회(Committee of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 CEEC) 창설
  • 마셜계획 조율하기 위해 창설됨
  • 유럽의 에너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석유 의존도를 증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림.
  • 1951년까지 유럽의 석유 소비량을 1938년 대비 2배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음.
  • 마셜 계획 입안자들에게 “필수 수송, 농업, 그리고 산업 유지를 위한 적정 수준의 석유 공급”은 이제 절대적 과 제가 됨
  • 석탄 부족 외에도 여러 요인이 에너지 전환을 뒷받침함
  • 정치적 관점: 석유는 석탄에 비해 정치적으로 더 신뢰할 수 있는 자원으로 인식됨
  • 급진적 요구를 앞세운 공산주의 계열 노조의 영향력으로부터 석유 공급망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
  • 기술적 관점: 석유=고효율 연로
  • 산업용 보일러 및 전력 생산 분야에서 석탄을 대체하는 데 이점이 있었음
  •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 초기: 유럽의 석유 소비 증가에 다소 유보적 입장
  • 그러나 유럽이 석유 의존 구조로 고착하게 된 것은, 유럽 수송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미국의 정책에서 비롯됨
  • 1947년: 석유는 유럽 에너지 소비의 10%에 불과
  • 1955년: 여전히 20%를 하회
  • 주목할 점: 1937년 이후 증가한 전체 에너지 소비량 가운데 거의 절반을 석유가 차지하고 있었음
  • 석유의 위상이 격상된 이유?
  • "석유 제품 외에는 실질 적인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는 도로 수송 체계의 급속한 팽창”
  • 마셜 계획은 유럽 국가들의 수송 체계를 도로 중심으로 전환시키는데 막대한 역량을 집중함
  • 도로 수송이 국제 무역 운용에 있어서 기존 방식보다 월등히 유연한 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 미국의 핵심 관심사: 미국에서 유럽으로 수입된 각종 물자를 유럽 전역에 분배할 수 있는 운송 능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경제 획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 유럽의 교통 인프라 개선
  • 1949년 미 경제협력국(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ECA) 보고서에는 석유 수요가 집중될 부분을 명시함.
  • 수송 부분(최우선 소비처) - 농업 - 산업
  • 도로 수송 부분만으로도 전체 석유 소비량의 4분의 1을 차지할 것으로 추산함.
  • 마셜계획 기획자들은:“석유가 유 럽 재건에 기여하는 가장 본질적인 가치는, 확장되는 산업 활동을 지탱할 수송 능력의 보장에 있다”고 판단함

수송 체계의 편재 및 운용 방식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이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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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EC 유럽 측 대표: 철도 수송과 그 역량 복구에 초점
  • 마셜계획 기획자들: 도로 수송 체계가 철도 대비 우위를 점한다고 확신했던 마셜계획 기획자들은 유럽 정부들의 이러한 요구를 국영 철도 부분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행태로 간주함.
  • 결과적으로, 유럽 측이 철도 수송 재건을 위해 화차(freight car) 증편을 요구했을 때, 마셜계획 기획자들은 CEEC가 제기한 물량인 10만 4,000량의 4분에 1에 해당하는 2만 6,000량 승인함.
  • 대신 미국은 수송 역량의 간극을 막대한 물량의 트럭 공급을 통해 해결하고자 햇음.
  • 미국은 일종의 유인책으로 미국인 관광 수요를 내세웠음. → 유럽이 도로 수송 체계로의 전환, 도로망 확충, 관련 지원 시설 확보에 역량을 집중하도록 압박함.
  • 만성적 '달러 기근'에 시달리던 당시 유럽의 경제 상황에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다는 이러한 논리를 무시하기는 어려웠음.
  • 애초부터 CEEC는 미국인 관광을 “실질적인 무역외 수출이자 달러 부족 문제를 해소할 결정적 기여 요인”으로 규정하고 있었음.
  • 이에 따라 기구 차원에 서 도로 수송 분야의 자유화 조치를 단행하고, 대미 관광 유치를 위한 다양한 방책이 강구됨.
  • 마셜계획이 유럽을 도로 수송 중심 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강구한 가장 직접적 조치: 도로 건설
  • 예시: 그리스, 터키 → 재정 지원, 엔지니어링, 장비 수급 등 도로 건설 사업 전 영역에 걸쳐 깊숙이 관여
  • 마셜계획 과정에서 형성된 대응 자금을 유럽 도로망에 대한 투자에 활용하기를 기대했음.
  • but 수송 체계를 바라보는 양측의 인식 격차는 여전함.
  • 대응 자금으로 실제로 철도보다 도로 건설에 배정한 국가는 그리스, 터키 뿐
  • 반면, 반면 기존 철도망이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던 이탈리아, 프랑스는 여전히 철도 체계가 효율성면에서 우월하다고 판단. 대량 수송 효율성, 국영 철도 보호 등을 이유로 철도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선호함.
  • 마셜계획: 도로 수송 역량 강화 조치와 병행하여 차량 구매 예산으로 4억 달러 이상을 투입했음. 유럽 자동차 산업에 대한 무상 원조 및 차관 제공
  • 이에 힘입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차량 생산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킴.
  • 이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정책은 명백히 도로 수송 체계로의 전환을 지향했음.
  • 필연적으로 석유 소비의 증가를 의미함.
  • 물론 미국의 ‘견인’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것이 서유럽 스스로의 ‘유인’ 기제가 부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음.
  • 유럽의 자동차 생산업체, 관광 산업, 석유 관련 기업들 또한 도로 수송 확대에 명백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음.
  • 그럼에도 이러한 변화는 유럽 재건을 위한 미국 전략의 일부였음 또한 분명함.
  • 즉 “미국 의 영향만이 유럽의 이동성을 변화시킨 유일한 원인은 결코 아니었지만, 도로 이동성의 장점에 대한 미국의 끈질긴 강조가 이 전환 과정을 가속화 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

3. 소련의 대중동 정책에 대한 미국의 인식: 트루먼에서 레이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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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쇄 전략의 논리에 따르면
  • 미국의 국가 안보는 유럽의 안보와 번영에 달려있고
  • 유럽의 안보와 번영은 다시 중동이라는 주변부에서 생산되는 자원에 좌우됨
  • 이제 중동은 '유럽 때문에' 미국의 '사활적 이익' 중 하나가 되었음
  • 냉전 기간 내내 미 정책결쟁자들은 중동을 유럽 안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
  •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을 보장하는 책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기획하고 이러한 임무를 스스로 떠맡았음.
  • 트루먼 독트린의 선포를 기점으로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은 미국의 핵심 정책에 포함됨
  • 더불어 유럽으로 이어지는 동지중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해짐.
  • 예컨대 이 국방부는 중동산 석유가 끊길 경우 "유럽은 붕괴하여 공산화될 것"이라고 판단함.
  •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 문제 역시 동일한 틀에서 검토됨
  • 당시 미 당국자들은 미국의 '시오니즘' 지지가 아랍 정권들을 소외시켜, 궁극적으로 유럽의 석유 수급과 마셜계획의 성공을 위태롭게 할 위험성을 심각하게 우려함.
  • 이러한 전략적 우려는 수에즈 운하를 우회하여 석유를 직송할 수 있는 트랜스아라비아 송유관(Trans-Arabian Pipeline) 건설 사업을 미 국방부가 적극 지원하게 된 결정적 동기이기도 했음.
  • 1951년 3월, 이란의 석유 산업 국유화 선언
  • 미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도 중동 석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란산 석유의 상실 가능성과 그것이 유럽 경제에 미칠 파장을 심각하게 우려함.
  • 미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 역시 이 러한 정세 판단에 동의함.
  • NSC는 이란이 소련의 영향에 놓일 경우, 소련이 "서유럽 경제 생존의 기반인 중동산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거나 그 가용성을 제한할 수 있음"을 경고함.
  • 트루먼(Harry S. Truman): 역내 산유국들과의 관계 약화와 소련의 영향력 강화를 우려, 쿠데타를 목표로 했던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데 주저함.
  • 후임자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이후 복합적인 전략적 요인들로 결국 적극적 개입을 결심하게 됨
  • 1954년 1월 NSC의 정책 지침: 전략 측면에서 이란이 차지하는 중요 요인을 적시함
  • "현재 상황에서 서유럽 동맹국들은 중동의 석유 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이를 충족할 적정 수준의 석유가 확보되지 않으면, 서유럽의 방위는 불가능해지며, 그간 재건을 위해 투입된 우리의 투자는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서유럽은 상실될 것이고, 결국 자유 진영의 전략적 부담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1975년에 이르면 유럽은 평시 석유 소비의 최소 90%를 중동 지역에 의존하게 될 것으로 판단한다."
  •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판매 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판단을 중시함.
  • 그 기저에는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
  • 이는 1956년 수에즈 위기를 둘러싼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남.
  • 1956년 3월, 아이젠하워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음
  • "아랍 세계의 석유는 유럽 전체에 점점 더 중요한 존재가 되어왔다. 석유 공급이 차단되면 유럽 각국의 경제는 붕괴를 면치 못할 것이다. 유럽 경제의 붕괴는 곧 미국이 가늠조차 하기 힘든 수준의 심각한 난국에 봉착했음을 의미한다."
  • 1956년 6월 말, 존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 수에즈 운하="서유럽의 경동맥"으로 규정함
  • 수에즈 위기와 서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 간 관련성, 이러한 관련성이 곧 소련의 위협과 전략적으로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역설함
  • 아이젠하워: 운하를 "세계 최대의 공공재"로 간주함. 운하의 상실은 곧 "서유럽을 심각하게 마비시킬 것"으로 판단함.
  • 덜레스는 이를 다시 마셜계획과 연관지음. - "마셜계획이 달성한 모든 성과는 무위로 돌아갈 것이며, 유럽은 경제적 생존과 석유 수입을 위해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ㅏㄷ."
  •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영국・프랑스・이스라엘 동맹국들의 무력 사용을 반대한 이유: 아랍 민중 및 정권과의 관계 악화, 더 정확히는 서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과 관련된 고려에서 였음.
  • 서유럽과 중동은 분리된 지역이 아니라, 하나이며, 결합된 형태로 "세계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
  • 즉, "서유럽은 중동의 석유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근본적으로 중동 석유가 전략적 가치를 가지는 것 또한 서유럽 경제에 대한 기여를 통해 발현된다"라는 논리.
  • 1957년 1월, 미국은 아이젠하워 독트린(Eisenhower Doctrine)을 발표.
  •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에 직면한 중동 국가들에 군사 및 경제원조를 제공할 태세가 갖춰져 있음을 천명함.
  • 미국이 중동지역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는 독트린.
  • 기존과 동일한 전략적 논리가 깔려 있음
  • 즉, 유럽의 생존에 중동의 석유는 필수불가결하며, 만약 이 공급선이 차단될 경우 마셜계획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논리.
  • 1958년에는 한층 더 강경한 입장
  • 미구: 최후의 수단으로서 "서유럽의 (석유) 소비를 충족하기 위해 타 지역의 석유뿐만 아니라 근동 지역의 석유를 충분히 확보해야 하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무력 사용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잇어야 한다"라고 명시함.
  • 케네디(John F. Kennedy)와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 이전 정권들에 비해 중동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기조를 유지함
  • 그럼에도 수차례에 걸쳐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의 전략적 중요성을 역내 미국의 핵심 국익으로 강조함.
  • 이러한 판단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군비 지원을 통해 역내 안보를 보장하고자 했던 존슨의 이른바 양축 전략(two pillar strategy)에도 결정적 영향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된 아랍-이스라엘 간 군사적 긴장: 미국은 유럽에 대한 에너지 안보라는 관점에서 평가함.
  • 미국의 국익에 대한 동일한 사고틀이 닉슨 행정부의 중동 지역 인식, 특히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바라보는 전략적 관심의 핵심이었음.
  • "아랍국가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고, 가능하다면 이를 개선하는 것"이 미국의 주요 고려 사항이었음.
  • 이는 "미국의 중동 지역에 대한 막대한 석유 관련 투자와 더불어, 서유럽 및 일본이 중동산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현실" 때문임을 인정함.
  • 닉슨 본인도 서유럽과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함.
  • "중동산 석유는 일본에게 있어 필수불가결하다. 일본 석유 수입의 90%가 중동산이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유럽은 석유의 8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 우리에게도 중동은 중요하지만, 직접적인 수입량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베네수엘라와 미국 본토에서 석유를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중동산 석유는] 조만간 미국에게도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거대 공업국인 유럽 및 일본의 안보와 경제를 미국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유럽의 중동산 석유 공급은 미국 정책 수립의 핵심 변수로 재차 강조됨.
  • 몇 달 뒤 제1차 오일쇼크가 서유럽을 강타하자, 오일쇼크 그 자체가 전 세계적 현상임에도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는 여러 차례 고유가와 경제적 혼란이 ‘서유럽에서’ 인민전선 형태의 정부, 곧 좌파 연합 정부의 선거 승리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음.
  • 1971년, 영국이 수에즈에서의 철수를 공식화함.
  • 미국산 무기로 무장한 역내 대리 세력에 의존한다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은 이란의 샤Shah)에게 ‘역내 경찰’ 역할을 부여함.
  •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세력 균형'의 필요성을 언급, 한편으로는 해당 지역 석유의 주 수혜국이 유럽이라는 논리를 근거로 제시함.
  • 1980년 1월, 지미 카터(James E. Carter, Jr.): 페르시아만 지역이 ‘어떠한 외부 세력’에 의해서든 위협받을 경우 미국이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 하겠다고 선언함.
  • 이란 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대응책으로 수립된 카터 독트린
  • 신속전개군(Rapid Deployment Force, RDF)의 창설과 페르시아만 안보 체제(Persian Gulf Security Framework, PGSF) 구축을 골자로 함.
  • 이는 미국이 해당 지역에 직접 군사력을 투 사하는 데 필요한 병력과 전진 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음.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회고록: 미국, 유럽, 중동 3자 간의 전략적 상호의존성으로 인해 미국의 이러한 직접적 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했다고 설명함.
  • 카터 및 레이건(Ronald W. Reagan) 행정부 하에서 미국의 중동 정책: 서유럽의 높은 중동산 석유 의존도, 그리고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핵심적 위치’를 근거 로 정당성을 확보했음.
  • 이러한 논리는 NATO 내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됨.
  • 미국은 유럽 동맹국들에게 방위 역량 강화를 강력히 촉구함, 이는 유럽 주둔 미군 전력을 미국보다는 유럽에 훨씬 더 사활적 이익인 석유 수송로 보호 임무로 전환하기 위함이었음.
  •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내부 보고서와 비공식 논의 과정에서도 동일한 논지를 전개함.
  • 의회 보고, 언론, 연설 등 공식 석상은 물론, 퇴임 후 출간한 회고록을 통해서도 일관되게 표명됨.
  • 요컨대, 미국의 핵심 정책 기조로 유지되고 있는 카터 독트린은 1940년대 이래 미 당국자들의 인식을 지배해 온 과제, 즉 '서유럽에 대한 안정적 석유 공급'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음!

4.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성’에서 ‘이해관계의 차등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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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공급에 대한 미국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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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전기 서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 문제: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최우선 과제
  • 이들은 앞서 언급한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성’을 토대로, 중동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가 소련의 그것보다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더 높은 ‘도덕적’ 정당성까지도 갖는다고 인식함.
  • 서유럽은 중동의 석유가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반면 소련은 그렇지 않았음.
  • 미국은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이해관계는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 확보에 기반한 ‘긍정적(positive)’인 것으로, 소련의 이해관계는 자원에 대한 적대국의 접근 거부에 기반한 ‘부정적(negative)’인 것으로 인식함.
  • 서방의 취약성: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 -> 일종의 정당성 담론으로 전환한 셈
  •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불균형이 마셜계획이 주도한 석유 의존도 시화를 통해 더욱 증대되었음.
  • 궁극적으로 이러한 논리는 중동에 대한 미국의 세력권 편입 및 직접적 개입을 정당화함
  • 역으로 소련의 중동 지역으로 영향력 확대/역내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 등도 이해관계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듦
  • 미국의 태도: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성이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의 차등성으로 전이된 것.
  • 일방적으로 규정된 이해관계의 차등성은 냉전 기간 내내 소련의 중동 정책을 공격적인 것으로
  • 미국의 대중동 정책을 소련에 대응하는 방어적인 것으로 규정한 인식들
  • 트루먼에서 시작된 미국의 대외 정책관을 지배했던 이러한 인식틀은 이후에도 전략적 정당성을 인정받음.
  • 1977년 카터 취임 초기, 백악관/CIA 참모진: 소련의 중동 개입 의도를 두고 기존의 '거부적/부정적’ 관점과 소련이 실제로 해당 지역 석유에 대한 ‘실질적/긍정적’ 이해관계 를 갖게 되었다는 관점 사이에서 고심하는 기색을 보였음.
  • 이는 1970년 대 초중반 소련의 원유 생산 능력이 한계에 달하게 되면서, 중동산 석유 에 대한 소련의 필요가 발생했기 때문.
  • 같은 해 4월, 국방 장관이었 던 해럴드 브라운(Harold Brown)마저 소련이 역내에서 실질적/긍정적 이 해관계를 추구하는 단계에 진입한 것은 아닌지 따라서 역내 정책에 있어 좀더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음.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입장은 확고해 보임.
  • 1979년 6월 비엔나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 1979년 초 이란 혁명 직후 이루어진 정상회담에서의 대화.
  • 카터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서기 장에게 통보함.
  • “미국에게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활적 이익이 걸린 특정 지역들이 존재하며, 소련은 이러한 이익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 반도가 바로 그러한 지역이다.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소련측의 철저한 자제가 요구된다.”
  • 브레즈네프: 지리적 여건상 해당 지역이 소련과 미국에게 갖는 상대적 의미는 판이하게 다르며 따라서 중동 지역에 대해 완전히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고 반박함.
  • 양국의 근본적 인식 차이
  • 미국: 중동을 자원 확보 측면에서 자국과 서유럽의 사활적 이익을 주장함.
  • 소련: 지리적 근접성을 근거로 자신들도 해당 지역에 대한 정당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주장함.
  • 브레즈네프 입장: 미국이 중동을 마치 자국 영토처럼 주장하는 것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고 판단했을 것.
  • 역설적으로 소련이 산유국이자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두 가지 조건이 미국이 소련의 '부정적' 이해관계를 인식하게 하는 근거였음.

소련에 대한 왜곡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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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이 중동산 석유에 대해 부정적 이해관계만을 갖고 있다는 인식은 미국의 대소 봉쇄 전략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기 이전, 즉 유럽의 석유 공급 불균형성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존재했음.
  • 1944년 11월, 주소련 대리대사였던 조지 케넌(George Kennan): 워싱턴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타전함.
  • “최근 이란 북부에서 보인 소련의 행보는 석유 자원 자체에 대한 필요때문이라기보다는, 해당 지역에 대한 외세의 침투에 대한 우려, 그리고 작금의 모든 소련 정책을 관통하는 ‘위신’에 대한 고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즉, 이란 북부의 석유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은 러시아가 이를 실제로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타 세력이 이를 개발하도록 허용할 경우 초래될 수 있는 위험성에 기인한다.”
  • 케넌은 197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전략적 시각을 견지.
  • 당시 그는 소련 국경이 미국보다 중동에 훨씬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소련이 해당 지역 을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은 인정함.
  • 하지만 소련이 이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분석.
  • 1940년대 시점에서 이러한 분석은 분명 시기상조였음.
  • 당시에도 소련은 자체의 소비를 충족하기 위해 중동의 석유가 필요했음.
  • 미국의 최고위 전략입안자들도 소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는 있었음
  • 당시 저명한 석유 정책 자문관 월터 레비(Walter Levy): 소련의 전략에는 서방의 자원 확보 거부 목적의 ‘부정적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소련 자체의 석유 확보라는 ‘긍정적 이해관계’ 또한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음.
  • 따라서 케넌의 관점은 소련의 석유 산업이 재건된 1950년대 중반 이전에는 설득력이 없음.
  • 그러나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 후속 정권들은 이해관계의 근본적 차이에 기반한 케넌의 분석을 중동 전략의 기조로 전격 수용함.
  • 수에즈 위기 당시 CIA: 소련의 목표가 “[수에즈 위기로 인한] 혼란을 대서양 공동체 전체에 극대화"하고, ”특히 중동산 석유에 대한 서방의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서방을 경제・전략적으로 약화”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서방 내부의 갈등을 장기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있다고 분석했음.
  • CIA는 이러한 목표가 “필요하다면 중동 지역에서 소련이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추진될 것으로 전망함.
  • 즉, 소련이 서유럽의 역 내 석유 접근을 차단한 후, 그로 인한 공급 부족 사태를 틈타 자신들이 직접 유럽에 석유를 공급하겠다고 제의함으로써 상황을 전략적으로 역이용할 것이라 판단한 것.
  • 아이젠하워는 회고록에서 소련과 미국의 ‘이해관계의 차등성’을 또다시 강조함
  • “소련의 목표는 결코 수에즈 운하 통항권 확보에 국한되지 않았다. 운하 통행량 중 소련 선박이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중동산 석유도 목표가 아니었다. 소련은 석유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석유를 수출했다. 요컨대 소련의 목표는 ‘힘의 정치(power politics)’였다. 중동의 석유를 장악하고 운하와 송유관을 차단하며, 궁극적으로 서구 문명의 기반을 심각하게 약화 시키는 것이었다.”
  • 케네디 및 존슨 행정부 시기: 소련의 석유 생산량 증가, 세계 석유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는 중동 산유국들이 향후에도 유럽 시장에 “크게 의존”하게될 징후로 해석됨.
  • 즉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국은 중동지역/서유럽 간의 “필연적인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역설하여 중동 국가들의 여론 형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함.
  • 당시 미주 대륙과 소련은 모두 석유 수출국이었음.
  • 중동 산유국 정권의 생존을 포함한 국가 발전 전체는 소련과의 경쟁이 없는 서유럽만이 유일하고도 “실질적인 시장”을 제공한다는 논리.
  • 소련이 아랍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행위: 생존에 필요한 자원 확보 차원이 아닌,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유럽에 대한 간접 공격”으로 규정함.
  • 1968년, 케네디 행정부 시기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였던 존 바도(John Badeau)
  • ‘이해관계의 차등성’에 기반한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인식틀을 명확하게 보여줌.
  • “미국에게 중동 지역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세계 안보에 대한 서방의 책무과 관련된 교통 요충지이자, 비공산권 진영 대다수에 대한 핵심 석유 공급원이며, 소련의 잠재적 팽창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이기 때문이다. […] 반면 소련의 안보는 역내 교통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소련 자체가 석유 수출국으로서 외부 석유 공급에 의 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중동의 석유와 교통로를 장악하게 되면 소련은 서방 동맹을 약화시키고 동맹의 결속력을 와해시킬 수 있는 압박 수단을 확보하게 된다."
  • 키신저가 미국 외교정책에서 지배적 역할을 하던 1969~1977년에도 이러한 전략적 인식은 지속됨.
  • 1970년 3월, CIA는 소련이 중동 지역을 그들의 ‘최우선 관심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음.
  • 1973년 7월 NSC가 중동에서 미국과 소련의 각기 다른 이해 관계를 열거한 문건에서도 같은 인식이 확인됨.
  • 이 문건은 미국의 일차적 이해로 “자국과 동맹국을 위한 페르시아만 석유 접근, 그리고 그와 연관된 상업적・국제통화적 이익”을 명시하고 있는 반면,
  • 소련의 이해관계 기술에는 석유와 관련된 사항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
  • 하지만 이 시기 미국의 인식이 변화할 징조가 나타나기도 했음.
  • 소련의 중동산 석유 필요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
  • 1970년대 초, 기 존 핵심 유전 지대였던 볼가-우랄 지역에서 생산량이 고갈되어 가자, 소련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튜멘을 중심으로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을 시도 하고 있었음.
  • 혹독한 기후, 낙후된 기술, 막대한 비용 문제로 난항.
  • 이와 관련된 보고서는 1970년과 1973년 두 차례 CIA에 의해 작성됨.
  • CIA는 소련이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관련된 일련의 기술적・재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1980년경’ 소련은 ‘석유 수입국’으로 전락할 것이며 중동산 석유에 대해 미국과 같은 실질적인 이 해관계(즉 긍정적 이해관계)를 갖게 될 것으로 보고함.
  • 이는 소련이 중동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거나 통제해야 할 절박한 동기가 생김을 의미하므로, 미국에게는 위험한 군사적 위협으로 해석됐음.
  • 그러나 CIA는, 설령 소련이 중동지역에 그러한 이해관계를 갖게 되더라도, 중동 전체 석유 생산량 중 극히 일부에 대한 접근권만을 추구할 것으로 전망했음
  • “소련이 석유 수급의 안정성에 대해 일정 부분 [실질적/긍적적] 이해관계를 갖 게 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나, 주요 고객으로서 서방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 향력을 약화시키기에는 미미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분석.
  • 소련에게 석유 수요가 있다 하더라도, 중동지역은 소련보다 미국에게 ‘더’ 중 요하다는 의미.
  • 흥미로운 것: 미국 외교의 경향을 방어적이라고 보았던 개디스와 달리, 이 문제와 관련된 미 당국자들은 미국이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소련이 역내에서 미국을 대체하고자 하는 전략적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음.
  • 1979년 이란 혁명: 카터 독트린을 기점으로 훗날 역내 적극적 군사 개입의 상징이었던 CENTCOM 창설로 이어짐
  • 이 과정에서도 중동 내 소련의 의도에 대한 미국의 인식틀은 냉전 초기 미국의 대외 정책관을 지 배했던 관념과 동일했음.
  •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소련의 ‘에너지 자급자족’ 역량이 확실하다는 징후들이 포착되면서, 또 다시 ‘이해관계의 차등성’은 보다 더 강력한 힘을 얻게 됨.
  • 1970년 초중반 소련의 중동 개입 의도를 두고 미 정보 당국 내에서 ‘자원 확보(긍정적)’와 ‘자원 거부(부정적)’ 시각이 혼재하다, 결국 소련의 이해관계는 역내 정치적 영향 력 확대 및 서방 압박을 위한 부정적 이해관계로 결론이 내려짐.
  • 1979 년 초까지만 해도, CIA와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 대사관의 분석은 소련이 생존을 위해 중동산 석유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는 소련의 ‘긍정적 이해관계’에 무게를 두었음.
  • 그러나 같은 해 8월, 이란에 대한 소련의 의도와 역량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CIA는 소련의 중동산 석유에 대한 이 해관계를 다시금 ‘거부적/부정적’으로 규정했음.
  • 이번은 동유럽 지역과 소련의 경화(hard currency) 부족 문제를 근거로 내세움.
  • “역내 석유의 일부만 통제하더라도, 모스크바는 서유럽과 일본에 대한 새로운 영향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 설령 크렘린이 현재 이란산 석유가 자국의 경제 적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확보하는 것은 동유럽 국가들을 소련이 통제하는 석유 공급망에 지속적으로 종속시키고, 공산권 블록 내의 경제난을 완화하며, 모스크바에 새로운 경화 수입원을 제공할 것이다.”
  • 이를 저지하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
  • 한때 소련의 의도를 ‘부정적/거부적 이해관계’로만 규정하는 것에 회의 적이었던 브라운 국방장관도 1980년 9월이 되면 입장을 완전히 선회함.
  • 그는 이스라엘과의 회담에서 RDF과 PGSF의 필요성을 페르시아만 원유 수송로에 대한 소련의 위협과 결부시켜 설명함.
  • 미 당국자들은 1983년이 되면 페르시아만 석유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 간 이해관계의 차등성이라는 관점으로 완전히 복귀함.
  • 그들은 소련의 전략 목표를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여 모스크바가 중동산 석유를 일정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서유럽과 일본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레버리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규정.
  • 궁극적으로 역내 소련의 이 해관계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인식이 바로 카터 독트린과 CENTCOM 창 설을 관통한 전제였음.
  • 냉전 초기에 형성된 ‘석유 공급 구조의 불균형성’ 와 그로 인한 ‘이해관계의 차등성’이라는 구도는 중동지역에 대한 미국 전략사고의 핵심 구성요소로 자리잡았고, 냉전 말기에 내려진 가장 중대 한 결정들을 규정한 토대가 됨.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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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쇄 전략은 냉전 시기와 그 이후까지 미국 중동 정책의 핵심 기조였음
  • 미국: 전후 서유럽의 경제 재건, 소련의 서유럽 산업 장악을 두려워했음
  • 마셜계획은 봉쇄논리에 따라 설계됨.
  • 미국: 집행 과정에서 도로 운송 비중을 높임으로써 서유럽의 석유 의존성을 심화시킴.
  • 도로 운송에 소비 될 석유는 중동에서 조달될 예정
  • 미국: 불안정 지역으로 간주된 중동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석유 공급을 책임지게 됨.
  • 이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있어 구조적 취약점이자 소련이 서방을 와해시킬 수 있는 틈으로 인식됨
  • 미국: 석유 공급의 구조적 차이를 근거로, 비록 소련이 중동 지역과 지리적으로 훨씬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소련보다 해당 지역 문제에 대해 더 중요하고 더 정당한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인식’하게 됨.
  • 개디스는 저서 미국의 봉쇄전략 1982년 초판 서문의 각주에서 다음 과 같이 설명함.
  • “‘봉쇄’라는 용어는 미국의 정책이 방어 지향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다. 1945년 이 후 미국의 대외 기조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그렇다고 판단한다. […] 중요한 점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기존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을 자신들이 ‘야기’하기보다는 발생하는 난관에 대응한다고 인식했다는 사실이다.”93)
  • 1997년 출간된 개디스의 저서
  • 소련 붕괴 이후 새롭게 접근이 가능해진 문서들을 근거로, 냉전의 원인이 주로 스탈린의 성격과 그가 구축한 소련 체제에 있었으며, 전후 초기 미국의 정책은 구조적으로 방어적 대응이었 다고 재차 주장함.
  • 개디스: 봉쇄의 동기를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동기에서 찾는 역사적 관점. 즉 미 제국(American empire)이 독자적인 내부적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아주 짧게 언급한 후, 반박함.
  • "만약 봉쇄해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셜계획을 중심축으로 하는 봉쇄 전략이 과연 수립될 수 있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 결론: “미국 제국은 소련 제국처럼 내부적 원인이 아니라, 미국의 고립주의를 압도할 만큼 강력했던 외부 위협에 대한 인식에 의해 형성되 었다.”
  •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이 가지는 구조적 불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 봉쇄 전략을 방어적 개념으로 규정하는 개디스의 논리는 미국의 대유럽 정책을 미국의 대중동 정책과 완전히 분리할 때에만 유효함.
  • 그러나 두 지역에 대한 정책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연관성은 전후 미국의 기획과 전략에 의한 것이었음.
  • 개디스는 ‘방어적’ 대응이라고 분석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군사개입 범위를 전략의 최우선 순위인 유럽을 넘어 중동 지역으로까지 확장토록 만들었음.
  • 1982년 저작: 냉전 시기 미국 전략의 방어적 성격을 당연한 전제로 간주
  • 유럽에서의 봉쇄 논리: 서유럽의 중동산 석유 의존도를 고착화함.
  • 이러한 의존성은 역으로 봉쇄 범위를 한 겹 더 확대하는 정당성과 필요성을 제공한 셈.
  • 새로 설정된 중동에 대한 봉쇄의 ‘원’은 앞서 존재하던 유럽에 대한 봉쇄의 ‘원’을 방어하기 위한 논리적이자 필연적 조치였던 것
  • 윌리엄 윌리엄스(William A. Williams): 미 제국의 ‘고유한 내부적 기원’을 추적하면서, 미국 외교정책이 미국 정치 경제의 내재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
  •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른바 ‘문호 개방’ 정책은 미소 간의 대립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함.
  • 실질적으로 소련에게 적대 행위의 동기를 제공.
  • 즉, 미 제국주의의 특수한 내부 동인이 대결 구도를 심화시켰다는 것.
  • 윌리엄스 입장: 이는 비극적인 현상. 바로 그 정책 자체가 애초에 억제하고자 했던 것을 오히려 조장했기 때문.
  • 바로 그 때문에 그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
  • 봉쇄 전략은 결국 승리. 따라서 윌리엄스가 주장한 ‘필연적 실패’ 는 오판인 것처럼 보임.
  • 그러나 윌리엄스의 봉쇄정책에 대한 비극적 관점은 현재에도 여전히 미국의 중동 정책을 이해하는 유효한 분석틀.
  • 윌리엄스의 저서 서론 첫머리에 붙은 표제 인용문에서 우리는 카를 야스 퍼스(Karl Jaspers)가 제시한 비극의 정의를 마주하게 된다.
  • “우리는 진정 한 비극을 […] 발전과 성공을 조기에 단절시키는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 그 자체에서 자라나는 파괴에서 발견한다.”
  • 유럽에서의 봉쇄정책: 유럽의 석유 공급 구조의 차이와 석유 의존 심화를 초래.
  • 이는 다시 미국의 중동정책을 규정짓는 핵심 요인이 됨.
  • 이러한 정책 기조는 해당 지역 민중과의 대립을 고착화시킴, 결과적으로 1979년 이란 샤 정권의 붕괴에 일조함.
  • 이란 혁명: 다시 카터 독트린과 CENTCOM 창설로 이어짐.
  • 어찌보면 미국이 역내에서 수많은 전쟁을 수행할 때 훨씬 높은 작전 효율성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대단한 성공으로 간주됨.
  • 그러나 역으로 개입은 다시 역내 민중과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킴.
  • 예컨대 알카에다 등이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는 명분 중 하나가 됨.
  • 유럽에서의 봉쇄 전략의 성공이야말로 CENTCOM으로 상징되는 적극적 군사개입의 필요성을 만들어 낸 조건이었음을 이해하는 순간,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봉쇄 전략을 비극적으로 보는 시각이 방어적 전략으로 보는 시각보다 훨씬 더 큰 진실을 담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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