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지순至高至純

기고한 글 · 기획·인터뷰

[본캐와 부캐 사이] (42) 소설가 : 점묘화처럼 이야기를 그리다(정세랑)

※ <본캐와 부캐 사이>는 사범대학 및 교육대학원에서 배운 것을 다른 학문에 접목하여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을 담습니다. 갈수록 좁아지는 임용고시 문턱 앞에 서서 임용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대학교에서 배운 전공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여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색다른 직업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을 소개합니다.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소설가 정세랑입니다.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03학번입니다. 소설을 주로 쓰고, 영상이나 전시를 포함한 다른 매체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새해에 즐거운 인사 드리게 되었습니다. 활기로 가득한 2026년 보내시길 바랍니다.

| 작가님께서는 편집자로 일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셨음에도 교육 계열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하신 계기가 있나요?

수업 시연이나 실습 중에 길게 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변의 다른 학우들에 비해 두서없고 산만한 편이더라고요. 노력하면 어느 정도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탁월히 잘할 수 있는 자질은 없는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들쭉날쭉해서 창작에 적합한 면이 있는 머릿속은 사실 정연하고 조직적이지는 못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입니다. 또 발음이 특히 좋지 않아 고민하다가 병원에 가 여쭤보기도 했어요. 알고 보니 일반 성인 평균보다 혀 길이가 짧더라고요. 실습 때 학생들이 제가 말하는 고유명사를 거의 받아적지 못했던 게 떠올라 한층 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보다 읽기와 쓰기가 주가 되는 출판계로 졸업 후 취직했습니다만, 이후 작가가 되자 또 말하기가 필요해져 곤란함을 느끼곤 합니다. 요즘도 강연 등에서 책 추천을 할 때 책 제목이 한 번에 제대로 전해지는 적이 없습니다. 북토크가 산만하다는 평도 드물지 않게 듣습니다. 10분도 20분도 아니고 한 시간에 가깝게 전달력을 갖추고 강의할 수 있는 능력은, 드물고 어렵게 얻어지는 능력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 작가님의 소설에는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SF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습니다. 이런 경계를 허무는 서사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일상에서 시작해서 비일상으로 미끄러지는 이야기를 유독 좋아하기도 하고, 현실과 먼 가공의 세계가 놀이동산의 거울처럼 기능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굴곡이 있는 거울에 진실이 포착되는 순간도 있지 않나 하고요. 과감히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한 자리에서 읽었다 해도 모험가의 마음이 남는다고도 믿습니다.

| 작가님의 글 속에서는 온기가 느껴집니다. 작가님의 글이 어떤 영향을 미치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며 글을 쓰시나요?

저는 이야기가 '요약'과 '단정 짓기'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복잡하게 헤아리게 하고, 당장 딱 떨어지는 답이 없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파고들게 하는 것이 이야기의 본분이라고 봅니다. 제 이야기가 매일 태어나는 수천 개의 이야기 중 하나로 그 역할을 점묘화의 점처럼 해내면 좋겠습니다.

| 지난 2020년에 『보건교사 안은영』을 성공적으로 영상화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영상화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신지요?

『지구에서 한아뿐』과 ‘설자은 시리즈’를 영상으로 보고 싶습니다. 책은 책대로의 매력이 있고 영상물은 종합 예술로서의 매력이 있어 양쪽에 다 끌리는 편입니다.

| 사범대학 재학 기간에 배웠던 교육과 관련된 전공 지식과 경험들이 현재 직업으로 활동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혹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요?

전공 덕분인지 시간과 공간을 큼직큼직하게 쓴다는 평을 들어왔습니다. 또 최근 몇 년 동안 집필중인 ‘설자은 시리즈’는 재학 기간에 얻은 씨앗들이 움튼 결과물일 거예요. 쓰면서 '공부 좀 더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학문적 자질은 없고 지나치게 지어내버리는 타입이라 길게 공부는 못했겠지요.

오래된 문화적 자산을 현대인들이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가공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무얼 찾아보아야 하는지 지도를 그려둘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전공 지식에 내내 기대어왔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그들을 현재의 도구로 쓰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태도도 재학 시절 배웠고요. 역사교육과에서 뵈었던 분들이 드문드문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힘도 납니다.

|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국제 행사가 한국에서 열리거나, 한국 작가들이 해외 행사에 참여하는 일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만나게 되는 해외 독자 분들은 한국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어마어마하십니다. 한국 문학의 지난 백 년 동안의 흐름을 꿰고 있는 분들도 계시고,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은 물론, 역사 소설의 배경 설명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앞에 서기 부끄러워지지 않게 더 풍부히, 깊이 고유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이야기를 써나가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또 한국 문학은 홀로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기보다 K팝이나 K드라마의 영향으로 알려진 부분이 크기에 인접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토록 한국 문화가 장르를 가릴 것 없이 주목받을 때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의욕이 있습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미래의 계획이 있다면요?

희곡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소설과 영상 각본 작업에서 시간과 공간을 쓰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연극은 또 다를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아이디어 단계이지만 꼭 완성하고 싶습니다.

| 끝으로 관련 진로를 고민하는 사범대학 및 교육대학원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교육의 길을 걷지 못했지만, 여전히 청소년 독자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같은 곳을 향한다 해도 길은 여러 갈래일 수 있는 듯합니다. 잘 맞는 길을 선택하실 수 있기를, 설령 조금 헤매신다 해도 그 시간에서도 나름의 결실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 프로필 사진은 정멜멜 사진가의 작품이다.

정세랑 소설가

  • 정세랑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 『시선으로부터,』,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등을 썼다. 창비장편소설상, 한국일보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본캐와 부캐 사이] (42) 소설가 : 점묘화처럼 이야기를 그리다(정세랑) - 교육신문

블로그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