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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 글 · 서평

『어른이 되면』

혜정이가 아직 시설에서 생활할 무렵, 나와 함께 종종 외출할 때가 있었다. 혜정이는 가끔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면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
스물을 훌쩍 지나 서른이 가까워오는 혜정이의 입에서 "어른이 되면"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간 혜정이가 살아온 시간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다'는 말로 얼마나 오랫동안 혜정이는 수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까. 혜정이에게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해왔던 그 사람들은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언젠가 혜정이가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해보았을까? (171쪽)


장혜영 작가(前 국회의원)에게는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 혜정이 있다. 혜정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13살 때부터 18년을 산속 외딴 시설에서 살았다. 작가는 어느 순간 혜정이 자신의 삶을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동생이 시설에 살아야 하는 것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면』은 장혜영 작가가 동생 혜정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함께 살면서 겪은 400일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시설에 살고 있던 장애인이 시설 밖 지역사회로 다시 돌아와 사는 것을 '탈시설'이라고 한다. 나는 혜정이의 탈시설을 돕기로 했다. 혜정이를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혜정이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우리 사회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어야 했다. 나와 혜정이의 삶 사이에 놓인 간극은 그 구호와 실천 사이에 놓인 거리와도 같았다. 혜정이의 부자유가 불운이라면 나의 자유는 행운이었다. 우리의 자유를 운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자유는 권리여야 했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쟁취해야 했다. (38~39쪽)

출간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이 책을 다시금 펼친 것은 개인적 이유다. 나에게는 늙지 않는 언니가 있다. 그를 정의할 수 있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마 장애인일 것이다. 나의 언니는 중증 발달 장애인이다.

‘누가 언니를 돌볼 것인가?’ 엄마는 더 병들고, 늙어갈 것이다. 엄마가 장애인을 낳았다고 해서 그 책임을 모두 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부모가 장애인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본다. 장애인으로, 장애인의 가족으로 사는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엄마는 예수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난 엄마야말로 성인(聖人) 경지를 초월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 일이어야 할까. 모든 것을 떠나서 이러한 고통을 부모로서 한 개인으로서 마주해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타인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235쪽)

지난 여름, 언니를 따라 치과에 간 적이 있다. 그 치과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대학 병원으로, 장애인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옮기게 된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은근한 해방감을 느꼈다. 언니와 닮은 사람들이 모인 공간. 비로소 언니가 가진 다른 정체성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 그날의 언니는 흰 피부를 가진 30대 여성, 커피와 케이크, 문화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의 언니는 평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한국에는 전체 인구의 약 5%, 263만여 명의 장애인이 존재한다1). 이중 약 88%가 후천적 원인으로 장애를 얻었다2). 『어른이 되면』은 장애인 혹은 장애인의 가족이라면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차별과 사회·복지 시스템의 민낯을 드러낸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시위를 비난하는 사회.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한국 사회를 비난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낭만적인 몽상에서 빠져나온 지는 오래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 -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장혜영 작사·작곡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야기가 세상에 필요하다고 느낀다.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1인칭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잠시나마 장애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 더 부드러운 세상이 될 수 있다면.

연약한 언니와 함께하는 삶의 모든 순간이 고통인 것은 아니다. 인생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 희비(喜悲)가 교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감사하다. 그 덕분에 삶의 다양한 양태를 몸소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언니와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한 걸음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따뜻한 세상이라고 믿으며.

우리의 이야기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하나의 울림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 책의 끝은 우리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말하기보다는 오랫동안 듣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238쪽)

1) 2024년 12월 기준
2) 2023년 장애인 실태조사

장혜영 작가, 前 국회의원

  • 다양한 직업을 거쳐 지금은 정의당 국회의원. 이전에는 감독이자, 뮤지션이자, 작가이자 유튜버이기도 했다. 18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아온 중증발달장애인 여동생을 다시 사회로 데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면서, 이 사회에 발달장애인의 탈시설과 자립에 관한 화두를 던졌다. 지금의 정치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차별과 싸우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다양성의 시대, 모든 시민이 존엄과 인권을 평등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2021년 ‘떠오르는 100인’ 가운데 한 명이다.

『어른이 되면』 - 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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