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개국 이전의 이성계
<이성계의 등장>
-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현재의 간도)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함.
-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 손자 이춘이 대대로 원나라에서 관리를 지냄.
- 춘의 아들 이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음.
- 이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 이주민들에게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회의를 품기 시작함.
- 당시 원나라는 원주민/이주민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 차별 호적을 만들어놓고 있었음.
- 고려인 관리 이자춘은 고려를 돕기로 결심함
- 당시 중국: 한족이 주원장을 중심으로 명을 건국함.
- 원은 중원에서 밀려나고 있던 상황.
- 공민왕: 반원정책을 실시,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고 함.
- 이를 위해 동북면 유민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음.
- 이자춘: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함.
-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와 함께 고려가 99년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함.
- 이자춘은 공적을 계기로 대중대부사복경이 되어 개경으로 오게됨.
- 1년 뒤 1356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으로 되돌아감.
- 고려의 조신들: 이자춘이 토착 기반을 이용하여 고려를 배반할 것
- 공민왕: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
- 이자춘은 4년 후 1360년에 병사함.
-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됨.
-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 선조를 추존함.
- 이안사: 목왕, 행리: 익왕, 춘: 도왕, 자춘: 환왕
- 태종 시대에 선조들이 다시 추존됨.
- 이안사: 목조, 행리: 익조, 춘: 도조, 자춘: 환조
- 이성계는 1335년 화령부(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남.
- 장남,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음. 궁술에 뛰어남.
- 성년이 될 무렵, 14세기 중반 문인보다 무인이 대접받던 시기
- 중원: 명이 원을 위협하고 있었음
- 만주 지역: 여진족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
- 남쪽: 왜구의 노략질
- 20살도 되기 전에 이미 동북면 지역에서 뛰어난 궁수로 이름을 알렸음.
-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의 옛땅이자 원의 점령지인 쌍성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진력함.
- 고려가 이자춘의 도움으로 쌍성에 있던 원의 총관부를 함락시킨 후, 고려 변방을 지키는 주역으로 성장하게 됨.
- 아버지의 사망 후,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감.
- 이듬해 10월,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됨.
- 같은 해,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함.
- 1362년, 원의 나하추: 홍원 지방으로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
- 고려: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 벼슬을 제수함.
-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됨.
<이성계의 활약상>
-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1388년 위화도 회군: 3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음
- 쌍성총관부 재탈환을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 격퇴 → 장수로서의 능력 인정 받음
- 1362년 나하추: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인 삼살(북청), 홀면(홍원) 일대를 침범
- 고려: 동북면도지휘사 정휘를 내세워 전투, 패배
-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병하여 나하추와 전쟁
- 1364년(공민왕 13) 원의 순종: 공민왕 폐위, 덕흥군을 새로운 왕으로 지명
- 최유, 김용 등 덕흥군 일파에 군사 1만 지원
- 공민왕은 일단 사실을 보내 순종의 군사를 회유하려 했으나 기황후(기철의 누이)로 인해 실패함
- 고려 왕실 VS 덕흥군 부대의 무력전
- 의주: 안우경 VS 최유 부대
- 최영, 이성계 VS 덕흥군 부대
-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림으로써 중앙 돌파에 성공함
- 덕흥군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원으로 달아남
- 1396~1370년: 공민왕의 명을 받아 만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녕부 공격함
- 1376년(우왕 2): 왜구에 의해 충청도 공주 함락, 개경이 위협 받자 군사를 남으로 몰아 왜구 토벌에 나섬
- 14세기 일본: 호죠정권이 몰락하고 사무라이 군벌이 들어서면서 내분에 시달림
- 1377년: 고려에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전라도 일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침
- 1380년: 소년 장수 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함. [황산대첩]
- 최무선이 화약, 화통을 응용한 포를 등장시킨 것도 이때임
- 1382년: 여진의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동북면 지휘사가 되어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들을 격퇴함
- 1385년: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시킴.
- 직급의 변화
- 동북면병마사(1362) → 밀직부사(1362) → 동북면도지휘사(1382) →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1384) → 수(守) 문하시중(1388)
2.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의 개국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 1388년: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함.
- 개경을 함락한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함, 우왕을 폐위시킴. → 정권 장악.
- 고려의 요동 공격 이유: 명의 무리한 공물 요구, 철령 이북 땅을 차지하려고 고려를 위협함.
- 명의 주장: 철령 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함. →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것.
- 고려는 이에 반발하여,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고 주장함. (1388년 2월)
- 우왕: 최영-팔도도통사, 조민수-좌군도통사, 이성계-우군도통사로 임명
- 5월: 이성계,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함.
- 위화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
-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마.
- 이성계: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림. →'사불가론'
사불가론(四不可論)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각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 우왕, 최영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함
- 이성계: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 후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함
- 이성계, 조민수: 최영 군대와의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함.
- 최영: 고봉현 유배, 우왕: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냄.
-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함.
위화도 회군에 대한 사학자들의 견해
-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된 쿠데타
- 요동성을 공략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단행한 자구책
- 사불가론: 사대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함
-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실리주의적 선택
- 저자의 견해: 결과적으로 보면 위화도 회군은 정권 장악을 노린 쿠데타 였음
- 그러나 경쟁 관계에 있던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단행한 것으로 볼 때 계획된 행동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오히려 상황 판단에 따른 실리적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고려왕조의 최후>
- 조정을 장악하고 좌시중(조민수), 우시중(이성계)에 오름
-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하게 함
- 의복: 원의 호복 금지, 명의 호복 착용
- 차기 왕을 옹립하는 문제
- 조민수: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 이성계: 우왕, 창은 신돈의 자손. 왕씨 일족 중에서 왕을 세워야 함.
- 조민수: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함.
-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김, 안씨는 우왕의 아들 창에게 왕위를 물려받게 함.
- 19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름(1388년 6월)
- 창왕: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당함.
- 표면적 이유: 창왕은 왕씨가 아닌 신씨
- 이성계, 정몽주 등: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
-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킴 → 공양왕
- 공양왕: 즉위 직후, 폐위된 우왕&창왕 살해.
- 창왕을 옹립한 조민수: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됨. 창녕으로 귀양감.
- 이성계 일파의 완전한 고려 장악.
- 창왕이 폐출되었을 때, 조정 중신들 중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음
- 이성계: 권고 사양, 공양왕 세웠음
- 마지막 정적이던 조민수 실각 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 가속화됨.
- 3년 뒤,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함.
-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보냄.
-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림.
-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됨.
-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 폐위 후,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문을 붙여 왕씨들을 한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
- 방문의 내용: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
- 불안에 떨던 왕씨들은 이런 약속을 믿고 강화도 행 배를 탔다가 대부분 수장됨
- 이때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간파한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았음.
- 산 속에 숨어 살면서 대게 자신들의 성씨를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용(龍) 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전해짐
- 태조실록에는 왕씨의 후손들은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음.
-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음.
3. 조선 태조로서의 이성계
1335~1408년
재위기간: 1392년 7월~1398년 9월 (6년 2개월)
-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이방원의 사주로 살해됨
- 이성계는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함
새 왕조의 기반
- 즉위 초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 의장/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함
-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드려 국호를 바꿈.
- 국호를 개정한 후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함.
- 무학, 정도전에게 새 땅을 물색하도록 함.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결정함.
- 1393년 9월~1396년 9월: 궁궐 건립 공사
- 궁궐이 완성되지 않은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옳김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 편찬(1394), 숭유억불 정책(유교 숭배, 불교 배척)
- 한양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움 → 유학의 진흥, 전국 사찰 폐지 등
왕자의 난
- 이성게는 즉위 직후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결정함.
-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이방석과 일곱째 아들 이방번을 함께 살해함.
-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함.
- 와병 중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하여 그해 9월에 둘째 아들 이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됨.
- 1400년, 이방원이 동복형인 이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름
- 이성계는 태상왕이 됨.
- 이성계는 이방원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한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음.
- 이때 이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함.
- 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 이성계는 이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옴
-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며 덕안전을 새로 지어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냄
-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사망함.
-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음.
4. 태조 이성계의 가족들
- 정비 2명, 후궁 4명 / 적자 8명, 적녀 3명, 서녀 2명
-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장남 방우, 여섯 형제, 두 딸
- 신덕왕후 강씨: 방번, 방석 형제, 딸 하나
- 4명의 잉첩(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1명): 2명의 딸
-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후궁은 의령옹주를 낳았다는 내용 이외엔 별다른 기록이 없음
<신의왕후 한씨>
- 이성계가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 옴
-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사망
- 6남 2녀
-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
- 경신, 경선 등
- 조선 개국 다음 날, 한씨의 시호는 절비로, 능호는 제릉으로 추존됨
- 1398년: 정종 즉위 후에는 신의왕후로 추존됨
- 제릉은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음
- 능을 개성에 둔 것은 조선 개국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임
<신덕왕후 강씨>
-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
- 강윤성: 원나라 지배 시기 고려에서 찬성사 벼슬을 지낸 인물
- 신의왕후 한씨보다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셈
-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 조선 개국 이후에도 막강한 영향력 발휘.
- 태조는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함.
- 소생: 방번, 방석 형제(이방원에 살해당함), 경순공주
- 이성계 개국 이후 강씨는 현비로 책봉됨
- 1396년 사망 후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
-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은 몇 차례 이장을 단행함.
- 신덕왕후에 대한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함
-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됨.
- 송시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릉이 왕비의 능으로 조성됨 점을 일깨웠음
- 정릉은 현재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음.
-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정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됨.
- 여러 차례 이장함
- 1번째 이장: 이성계 사망 후 태종 9년 때: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에 대한 분풀이로 이장함.
- 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노골적 분노를 표출함.
- 정릉은 현종 때 복구될 때까지 200여 년 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었음.
이성계의 아들들
- 아들은 모두 8명.
- 신의왕후 한씨 소생 6명, 신덕왕후 강씨 소생 2명.
- 제1차 왕자의 난: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함
- 8명의 형제 중 방과와 방원은 각각 정종실록과 태종실록 편에서 다루기로 함.
- 덕안대군 방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음.
<진안대군 방우(1354~1393)>
- 1354년 신의왕후 한씨 장자
-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
- 예의판서 역임
- 창왕 즉위년(1388): 밀직부사로 밀직사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됨
- 창왕의 친조를 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함.
-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 진안군으로 책봉됨
-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전으로 받음
- 지병으로 이듬해 40세에 사망함.
-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제2대 왕은 둘째인 방과가 이어받게 됨
<익안대군 방의(?~1404)>
- 신의왕후 한씨 셋째 아들
- 조선 개국후 익안군에 봉해짐
- 제1차 왕자의 난에 가담: 이방원을 보좌한 공로로 정사공신 1등이 됨
- 정종 즉위 이후: 경기도, 충청도를 관장함
- 1400년 아우 이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관직을 사퇴하고 간접적으로 이방원 지원함.
- 태종 즉위 후 1400년 익안대군으로 진봉됨
- 1404년 사망
-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야심이 적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
-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킴
<회안대군 방간(1364~1421)>
-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
- 찬서찬성사 민선의 딸과 결혼, 2명의 아내를 더 두었음.
- 조선 개국 후 회안군에 봉해짐
-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회안공이 됨
- 정종 즉위후, 풍해도 서북면의 병사를 관장함
- 1400년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방원과 대립함
- 이방원의 군대에 패배해 생포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유배지를 전전함
- 왕권에 대한 야심이 잇었고, 성격도 괄괄한 편.
- 박표에게서 이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자 앞뒤 가리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진군함.
- 난을 일으켰음에도 태종/세종의 배려로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58세에 홍주(현재 충남 홍성)에서 사망.
<무안대군 방번(1381~1398)>
- 신덕왕후 강씨 소생, 태조의 일곱째 아들
- 귀의군 왕우의 딸과 결혼
- 이성계의 지원에 힘입어 어린 나이에 고려 왕조로부터 고공좌랑의 직위를 제수받음
- 조선 개국 후 무안군에 책봉됨. 의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됨.
- 1393년, 13세의 나이로 좌군절제사로 제수됨
- 태조, 강비의 추천으로 세자에 내정되기도 했음
- 조준, 정도전 등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함
-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석과 함께 피살됨. 그의 나이 18세.
-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정해졌으나 광평대군이 요절하면서 이방번의 후사는 끊김.
<의안대군 방석(1382~1398)>
- 이방번의 연년생 동생. 태조의 여덟째 아들.
- 현빈 유씨와 결혼함.
- 유씨가 폐출되자 춘추관대제대학 심효생의 딸과 재혼함.
-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있었을 때 ㅣ성계는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새우려고 했음.
-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의 반대로 무산됨.
- 11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된 이방석은 어머니의 보살핌, 개국공신들의 지원으로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으나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배후 세력이 급하게 약화됨
- 왕자의 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방번과 함께 살해됨. 이때 방석의 나이 17세.
-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음.
- 금성대군이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32세의 나이에 처형되자 후사가 끊김.
5. 이성계의 아버지와 형제자매
<환조 이자춘(1315~1360년)>
- 태조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 전주 이씨의 사조는 이한.
- 이안사는 원나라에 귀순하여 천호 벼슬을 얻었음. 행리, 춘, 자춘으로 이어지며 후손들이 벼슬을 대물림함.
- 이자춘은 1315년에 차남으로 출생.
- 몽골식 이름은 오로사불화.
- 형이 일찍 죽자, 어린 조카 교주(이천계)가 성장한 뒤에 벼슬을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형의 지위를 이었음.
- 그러나 교주가 성장한 뒤 자춘은 천호으 ㅣ벼슬을 돌려주지 않았음.
- 원간섭기, 홍건적의 난 등 -> 공민왕은 개혁을 실시하여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했음.
- 원나라 총독부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려는 계획
- 총관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이자춘도 고려와 내통하여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음.
- 1355년에 개성으로 찾아와 공민왕을 만난 뒤, 고려 조정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전함.
- 이자춘은 쌍성 회복의 공에 힘입어 대중대부 사복경 벼슬을 받음.
- 군기감 판사, 천우위상장군 등을 지내다가 1360년 영록대부 장작감 판사의 벼슬로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음.
- 하지만 그해 4월 지병으로 사망함. 이때 46세.
6.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게 된 배경
- 이성계는 즉위 직후 국정에 대한 강령 17개조를 발표하는 등 건국 후 제반 조처를 강구함. 이중 가장 시급한 현안이 국호를 개정하는 일이었음.
- 이성계는 중추원사 조림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신정권의 수립을 알리고 국호를 개정하겠다는 뜻을 전함.
- 명태조 주원장은 신정권의 수립을 수락하며, 국호 개정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보고해줄 것을 요청함.
- 국호 후보로는 '조선, 화령'이 있었음
- 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 등 역사적 맥을 잇는다는 의미
- 화령: 이성계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채택된 듯함
- 화령: 화주목 - 화령부로 개칭(공민왕시대)
-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한 1393년에는 이성계 외조부 출생진인 영흥진의 이름을 따서 '영원히 흥한다'는 뜻인 영흥으로 다시 바뀜.
- 이성계는 예문관학사 한상질을 명에 파견에 하나를 국호로 택해줄 것을 청함
- 한상질: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려 공신이 된 한명회의 조부
- 국호 결정과 관련하여 조선과 명의 입장은 달랐음.
- 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도
- 명: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에 흔쾌히 동의함
- 『논어』에 등장하는 은나라의 현인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였다는 『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
- 주원장: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을 뜻한다고 보았음
- 즉, 조선이라는 국호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사대주의적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는 이름이었음.
-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은 왕도정치의 구현, 중국과의 사대관계 유지를 이상적인 정치 및 외교로 인식함.
- 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과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일을 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기자동래설을 긍정적으로 수용했을 것.
- 고려시대에는 성리학 도입 이후인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세워진 기자릉에 대한 제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됐음.
- 그러나 기자조선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과 달리, 근대 이후 역사 연구에서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별개의 존재로 다루고 있음.
- 기자가 은나라 말기 현인으로서 실재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기자와 결합된 이른바 기자조선의 실체는 새롭게 규명되어야 함.
7. 새로운 도읍지 한양
-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고 무학, 정도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성을 옮길 계획을 세웠음.
- 개성: 이미 땅의 기운이 다했음. 민심을 일신하기 위해서는 도읍을 옮겨야 함
- 조선 조정: 권중화를 시켜 도읍지를 물색하게 함.
- 일차적으로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여 왕성 건립 시작
- 계룡산: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주장 (하륜)
- 도읍지는 한양으로 변경됨
- 한양: 백제 초기의 근거지
- 통일 신라: 한산주라고 불림, 이후 9주의 하나인 한주로 불림
- 경덕왕 14년(755)에 한양군이 설치되며 한양이라는 지명을 얻게 됨.
- 고려시대: 왕이 서경인 평양, 남경인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돌아가면서 머무르면 국운이 크게 융성한다는 지론에 따라 숙종 5년(1101)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함.
- 통일 신라: 한산주라고 불림, 이후 9주의 하나인 한주로 불림
- 일찍이 신라의 고승 도선은 "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들어설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가 될 것"이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음.
- 고려왕조: 중엽에 윤관에게 북악산 남쪽에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무성하게 자라자 베어버리게 했음.
-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궁궐터를 확정하는 문제
- 무학대사: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함
- 정도전: 대왕은 남쪽을 향하는 법, 동향을 하지 않는 것, 북악산 아래쪽 주장
- 무학대사: 화(火)산인 관악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궁을 앉히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쳐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
- 정도전: 관악의 화기는 가운데 있는 한강이 막아낼 수 있음.
- 조선 조정: 정도선 의견 채택
- 북악산 아래 왕성 짓고 궁궐을 남쪽으로 향하게 함.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불을 잡아 먹는다는 전설의 동물 해태 석상을 세웠음.
- 조선이 천도를 단행한 것은 1394년임.
- 한때 왕자의 난 등으로 개경으로 잠시 천도한 것을 제외하고 500여 년동안은 한양을 왕성으로 삼았음.
8. 조선 개국을 이끈 사람들
<새 왕조를 꿈꾸는 혁명가들>
| 친원파 | 반원파(공민왕) | ||
|---|---|---|---|
| 기씨 가문 | 최영(중앙) | 이성계(변방 세력) | |
| 왕족+훈구 | 성리학 이념 개혁론자들 | ||
| 역성혁명론자 (정도전) | 고려개혁론자 (정몽주) |
<역성혁명론을 실천한 풍운아 정도전>
- 출신 배경: 서얼 출신 노비 어머니
- 출생: 1337년, 겨북 영주
- 성균관 박사, 정몽주 등과 함께 명륜당에서 유학 강론
- 1371년: 태상박사 임명
-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노력
- 조선경국전 편찬: 새로운 법제돌의 틀 마련
- 천도
- 경제문감 저술: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 확립
- 요동 정벌 계획, 균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 병권집중 운동
- 경제문감별집 저술
- 불씨잡변: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 확립
- 1398년, 이방원에 의해 사망. 향년 62세.
<장수를 군왕으로 이끈 무학>
- 1327년 경상도 합천 출생
-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
- 법명: 자초, 18세 수선사(송광사)로 출가
- 출신 배경: 고려 말, 부모가 왜구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해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
- 천문지리, 음양도참설에 밝았음. 파자점, 해몽술에 능했음
- 이성계가 問자를 짚자, 어느쪽으로 보나 君이라며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함
- 꿈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王자라고 하여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함
-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함, 조선 개국 후에도 왕사로 받들었음.
9. 태조시대의 경제정책
<과전법의 확립과 토지제도의 정착>
- 고려 말, 전시과제도가 무너져 권문세가들이 불법적으로 겸병하고 점탈하여 대농장 소유하고 있는 상황
- 국가 재정 바닥, 녹봉 지급 불가, 대다수의 양민이 대농장의 전호로 전락 -> 병역 및 부역의 의무를 담당할 백성은 극소수
- 군량미 확보 문제 -> 군인 끼니 해결 문제
- 신진사대부 세력: 근본적으로 권문세가가 소유한 사전이 문제
- 공민왕: 전민변정도감 설치 -> 권문세가 반발로 실패
- 창왕 폐위, 공양왕 즉위 -> 권문세족 반발 차단, 과전법 공포
- 과전법
- 목표: 전국 토지 대부분을 국가의 수조지(조세를 받는 땅)로 편성
- 대농장에 소속된 사전들 중에서 극히 일부 토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환수
- 환수한 땅에서 농사 짓는 농민: 대농장주에게 내던 세금 -> 국가에
- 농장주: 경작 토지에 비례해 국가에 세금
- 영향: 농민에게 경작지를 돌려주면서 조세에 대한 부담 줄여줌. 국가로서는 세수 증가로 재정 안정.
- 과전법의 토지 분급: 사전과 공전으로 나뉨
- 과전을 토지 분배의 중심에 둠
- 문무관료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해 현직자, 산관(정해진 사무가 없는 관리), 즉 퇴직자/대기발령자를 막론하고 18과로 나눠 15~150결 사이의 전지가 직급에 따라 분급됨.
- 수신전(관리가 죽으면 수절하는 부인에게 지급), 휼양전(부인마저 죽으면 죽은 관리의 자제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지급) 등으로 부분적 세습 가능
- 성격: 관리의 직책에 대한 단순한 반대급부라기보다 관리, 그 가족들이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신분제적 분급수조지
- 답험손실법: 조세의 징수를 위해 조정의 관리, 전주가 매년 농사의 작황을 직접 답사해 세를 매기는 것
- 과전법의 영향
- 고려 말: 땅 주인에게 생산량의 반 이상을 바치던 것에 비해 경작자의 부담이 획기적으로 감소
- 신진관료의 경제적 기반 마련
- 조선 양반사회 지탱하는 토대
- 전체 농민의 약 70%가 자신의 경작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됨 -> 일반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에도 기여함
- 과전법의 실시로 국가에 대한 공역의 부담도 종래의 장정 수에 따라 매기던 것에서 토지 소유분에 따라 매기는 계전법으로 바뀌었음
- 즉, 장정 수에 따라 부과하던 공역을 소유/소득에 따라 부과하게 된 것
- 조선은 과전법의 확립을 통해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고 관계의 체계/관리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성공함
- 이후에는 직전법 확립
<상업조직과 시장의 발달>
- 3대 주요 사업: 궁궐 건축, 지역 나누기, 시장 세우기
- 이유: 궁궐에서 사용할 물자 조달, 백성들의 원활한 삶 유지
- 조선의 상업 기관(시장)
- 향시: 전국적으로 1천여 개 이상
- 고대 때부터 형성 된 것. 場, 5일에 한 번
- 지방민들의 상거래장
- 거래품목: 가내수공업품, 곡물, 가축 등
- 지방 백성들의 유일한 상거래 장소, 정보교환의 장
- 육의전(한양)
- 관아에서 설치한 공랑에 형성된 시장
- 전매특권, 국역 부담의 의무
- 국역부담: 임시 부담금, 궁중/부중의 수리 및 도배를 위한 불품, 왕실의 관혼기제, 중국에 파견되는 각종 사절의 세폐와 수요품 조달 등 -> 육분각전
- 이 중에서 국역 부담률이 높은 6개 상전을 육주비전/육의전이라고 한 것
- 육주비전, 육부전, 육분전, 육장전, 육조비전 등으로 불림
- 점포: 비단전, 무명전, 명주전, 종이전, 모시전, 생선전 등
- 태조대의 한양 시전 상인
- 공랑 상인: 육의전 상인으로 발전
- 좌가 상인(임시 점포)
- 행상인(점포 없이 노점)
- 한양 시전이 아직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은 아님 [과도기]
- 평양/개성의 상설 점포가 더 발달한 상태
- but 태종대에 이르면 8백여 칸의 좌우행랑을 마련하여 대단위 상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됨
- 중기로 가면서 공랑 상인이 좌가 상인, 행상인을 흡수하여 육의전으로 정착함
- 객주(지방도시): 화물집산지 구실
- 위탁받은 물건 판매, 매매를 거간함.
- 여각, 저각, 저점 등으로도 불림
- 객지에서 장사하는 여러 상인들의 주인 역할
- 생산자, 상인으로부터 매매를 위탁받은 물건을 모아서 상인들에게 유통시키는 것
- 여숙, 금융, 창고, 운송 등 여러 가지 주선 행위를 도맡는 자본가
- 유형
- 물상 객주, 여각, 만상객주, 보상객주, 보행객주, 환전객주, 무시객주, 경주인(여각 주인), 원우(숙박업) 등
- 보부상(행상)
- 보상(봇짐장수) + 부상(등짐장수)를 통칭한 것
- 보상: 주로 정밀한 세공품, 사치품 등 잡화
- 부상: 조집하고 유치한 가내수공업품, 토기, 철기 등
- 서로 취급하는 물품을 엄격히 구분하였음
-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며 생산자/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하는 전문적 상인
- 보부상은 고대사회부터 존속
- 보부상인 단체가 조직된 것은 조선 개국 이후
- 두가지 설
- 조선 개국에 공헌하여 조선 조정이 결성을 허용하였다는 설
- 상류계층과 무뢰배들로붜 보호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조직했다는 설
- 철저한 조직 체계
- 임원: 민주적 투표에 의해 선출 -> 지도자: 접장
- 접장: 군/도 단위마다 한 명씩 존대 - 군접장/도접장
- 접장을 이끄는 지도자: 도반수
- 때로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는 행동대원 역할 -> 관아에서도 무시 못하는 힘
- 두가지 설
- 보상(봇짐장수) + 부상(등짐장수)를 통칭한 것
- 향시: 전국적으로 1천여 개 이상
10. 조선 개국에 따른 인구 동향과 신분구조의 변화
- 고려 말: 어수선한 상황
- 왜구의 침입, 권력층의 착취를 피해 -> 북방 or 내륙 산간지역으로 이주
- 조선 건국: 왜구 감소, 사회 안정
- 산간지역의 백성들(강원도, 충청도) -> 평야, 도서지역으로 귀환(경기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등)
- 명나라의 흥기로 나라를 읽은 북방의 야인들이 조선이 개척한 북방으로 귀화 -> 인구 대폭 증가
- 숭유 정책 일환: 승려들에 대한 환속조치 -> 일반 백성 수 증가
- 조선: 개국 초부터 양인 확대 정책 펼침
- 양인 확대시책: 노비의 양인화, 환속한 승려의 양인화, 백정들의 양인화 등
- 산간지역의 백성들 -> 평야지역으로 끌어들임
- 강원도, 충청도 지역 인구 감소 -> 경기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등 인구 증가
- 조선: 북방 정책 시행 -> 백성을 북계로 이주시키고, 북방의 야인들을 귀화시켜 북계에 살도록 함
- 함경도, 평안도 인구 급격히 증가
- 조선 개국 당시 인구 500만, 병력 30만.
- 신분제
- 양민: 문무양반, 농민, 공인, 상인, 서얼, 기술관료 등
- 천민: 노비, 천인집단
11. 『태조실록』 편찬 경위
- 태조실록
- 총 15권 3책
- 1392년 7월 ~ 1398년 12월 (6년 5개월 12일)
- 책의 원명: 태조강헌대왕실록
- 현재 국보 제 151호
-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정종시대), 태상왕(태종시대)을 지내다가 사망
- 태종: 이듬해 8월 '태조실록' 편찬 작업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