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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 글 · 서평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을 알게 된 것은 6년 전의 일이다. 친애하는 친구가 ‘네가 쓴 시 같다’라며 『이 시대의 사랑』에 수록된 몇 편의 시를 사진으로 보내주었다. 그때, 가슴에 ‘최승자’라는 이름 석자가 새겨졌다.

시인은 1980년대에 활동했다. 해체적인 시어와 직설적인 어법을 사용하여 당대 현실과의 불화를 드러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시를 썼으며 인간 본연의 내면세계에 시적 인식의 바탕을 두고 탈권위와 탈신성, 탈중심적 사유로 부조리한 정치 권력과 삶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1989년에 출간된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그리고 32년 만인 2021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산문집을 특히나 사랑하게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때는 2022년, 9월. 난생처음 홀로 비행기를 타고 타지로 향했다. 2022년의 나는, 대개 20대 중반이 그러하듯이 모든 것에 익숙해졌고, 권태를 느꼈다.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1976)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깨고 나면 달콤했던 예전의 쓸쓸함이 아니고 쓸쓸함은 이제 내 머릿골 속에서 중력을 갖는다. 쓸쓸함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뒤켠 죽음의 근처를 응시하는 눈을 갖는다.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보이지도 않게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거대한 타의(他意)—오로지 물욕만을 따라 외곬로 뻗어가는 광기, 조직과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무서운 능력, 그 아래에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삭과 야곱의 모든 살붙이들의 선량하고 괴로운 관계 등 그런 모든 것이 합세하여 내 운명의 세포조직을 만들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내 인생과 운명의 배후에서 후렴처럼 비가 되어 내린다. 그 빗속에서 내가 꿀 수 있는 꿈이 자꾸 줄어들고, '인간답게'라는 가치 기준이, 진리가 자꾸 모호해져간다. 그래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야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죽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항해서 싸우는 필사의 길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 싸움에의 그 무슨 고독한 의지가 나를 키워주는지, 살려주고 죽여주는지, 그것을 따라 다시 나는 젊음이라는 열차를 타려 한다. 내가 잠시 쓸쓸해져서 슬며시 내려버렸던 그 열차를. 인생의 궤도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싸워가면서 사는 법, 살아야 하는 법을 철저히 배우기 위해. 공부하듯이…… (13~15쪽)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쓸쓸함을 안다고 고백한 시인은,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시대에 무기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항해 싸우는 필사의 길'밖에 없음을 알고,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싸움에의 고독한 의지를 따라, 인생의 궤도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타려 한다.

낯섦보다 익숙함이 앞서기 시작했던 20대 중반, 세상의 덧없음 앞에서 무기력감을 느꼈다. 나는 이대로 잠들어 있기보다 새로운 세상으로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세계과 나의 이면을 찾아보려 했다. 그러한 나에게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은 이 깨어남이 삶에의 도피가 아닌 지독한 응시임을 알려주었다. 최승자 시인의 축복 속에, 나는 다시 한번 젊음이라는 열차를 타보자고 결심했다. 새로운 인생의 궤도를 시작하고자 했던 그때의 마음은 아직도 남아, 여전히 어린 날의 순수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

어느 책에서 이야기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최승자 시인은 세상과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한다.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냉정하게 삶·죽음·세상을 바라본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죽음을 원하기에,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의 처절한 무게를 알고 있다.

새에 대한 환상은 그때 깨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움을 그리기 보다는 그들 날개짓의 중노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1996) (158쪽, 새에 대한 환상)

최승자 시인은 ‘잡균 섞인 절망보다 순도 높은 희망’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을 구축하기보다 파괴하고 분열시킴으로써 갈등을 극화시키고, 세계와의 불화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과 자학을 통해 스스로를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세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인은 비관과 절망에서 나아가 ‘삶’을 선택한다.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부정과 냉소의 감정을 지닌 자기를 수용함으로써 현재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인식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따라서 시인의 자학적이고 자살적인 언어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때때로 불안이 나의 목을 조른다. 그럴 때면 벽에 붙은 마야콥스키의 사진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죽는 수도 있어, 죽는 방법도 있어"라고 말한다. …(중략)…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도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그리고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 (20~22쪽, 산다는 이 일)

최승자 시인은 구도자(求道者)이자 ‘행복한 시지프’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감당하고자 한다. 세계에 피투(被投)된 존재로서, 검열에 가까운 고집스러운 성찰로 세계의 거대한 모순과 어둠을 포착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선택하는 것은 죽음이 아닌 ‘삶’이다.

내가 행복의 가능성을 기꺼이 믿지 못했던 것은 그 가능성이 너무도 작고 여린 반면 불행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너무도 단단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내 시각 자체가 너무도 굳고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무차별적 불행의 이상화 대신에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사실 죽음과 관능은 어쩌면 서로 떨어진 독립적인 게 아니고 한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파괴의 쾌락은 노력하기만 한다면 생산의 쾌락으로 변할 것이라는 낙관론을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뒤늦게나마 믿고 싶고, 믿으려 노력할 것이다. (55쪽, 죽음에 대하여)

'역마살의 청춘'처럼 방황하던 시기,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지독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세상의 비릿함을 낯낯이 표현한 최승자 시인의 자살적 언어 속에서 발견한 생(生)의 의지는 솔직해서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로소 삶에 대한 그의 처절한 부정(否定)은 삶을 지속하고 싶다는 지독한 긍정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죽음의 언어 속에서 투명한 삶의 이유를 발견했다.

슬프게도, 최승자 선생님은 오랜 시간 동안 조현병과 육체적 질환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 순수를 간직한 사람의 숙명인 것일까?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최승자 선생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부디 무탈하시길, 평온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참고문헌
김지율(2024), 「1980년대 언어의 경계를 넘는 최승자 시의 헤테로토피아」, 174-177.
문혜연(2024), 「최승자 초기 시의 죽음의식 연구 -『이 시대의 사랑』을 중심으로」, 국제언어문학,(57), 141-164.
홍인영(2025), 「문학교육에서 부정 감정을 통한 자기 성찰 교육 – 최승자의 산문을 중심으로」, 비평문학,(97), 181-223.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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