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지중해 세계의 재편: 로마제국의 세 상속자(5~9세기)
- 이슬람은 종교 공동체로 시작함. 처음에는 공동체였다가 왕조로 변화
- 전혀 다른 이민족이 동쪽으로 넘어와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세운 게 셀주크 튀르크
- 아랍인(아랍어 쓰는 사람들), 페르시아인도 아닌 돌궐인, 튀르크인
- 정치(세속 권력)에 큰 힘을 주는 게 튀르키에, 이란은 종교 권력에 힘을 줌
- 셀주크 뒤를 이어 몽골 제국 등장
- 일 칸국 자리를 오스만 제국이, 킵차크칸국 자리를 근대 러시아가 차지함
1. 페르시아 제국과 이슬람의 팽창
1) 두 페르시아 제국
ㅇ아르사케스조 페르시아(파르티아) (BC247~224)
- BC 247년 유목 페르시아인들의 아르사케스(安息) 가문이 셀레우코스 제국에 봉기하여 건국
- BC 2세기에 영토 확대, 왕권 강화
⦁ 지속적인 동/서 투쟁: 서쪽의 로마, 동쪽의 쿠샨
⦁ 기원전 66~기원후 217년 로마-파르티아 전쟁 지속, 국력 소진
- 동서교역로 장악(장건 이후 실크로드를 통해 한과 로마의 교역을 이음)
- 헬레니즘 문화를 기반으로 한 페르시아 문화, 다신교 사회
- 로마는 서아시아, 유럽, 북아프리카를 모두 포함함
- 현재에도 북아프리카에서 유적 발굴이 이루어짐
- 아르사케스 페르시아라서 안식국이라고 부름
- 서쪽으로는 로마, 동쪽으로는 쿠샨 왕조와 전쟁함
- 월지족의 일부가 구상족 - 구상이 쿠샨임
- 쿠샨에서 유명한 게 간다라 양식인데, 여러 양식 중 하나가 아니라 간다라 양식밖에 없음.
- 불상을 만든 거 자체가 헬레니즘
- 원래 불교는 부처를 상으로 만들지 않음. 감각적 상으로 외화시키지 않음 -> 보여야 믿지!
- 불교가 인도에서 건너가는 데는 중국의 영향보다 이민족의 영향이 큼. 위진 남북조 시대.
- 쿠샨에서 유명한 게 간다라 양식인데, 여러 양식 중 하나가 아니라 간다라 양식밖에 없음.
ㅇ사산조 페르시아(224-651)
- 사산(Sasan) 가문의 아르다쉬르 1세가 파르티아 제국을 전복시키고 페르시아 창건
- 서쪽으로 로마, 동쪽으로 쿠샨 및 에프탈과 세력 다툼
⦁ 샤푸르 1세(241-272): 에데사 전투에서 승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음
⦁ 샤푸르 2세(309-379): 소아시아 획득, 로마에 대한 군사적 우위
⦁ 호스로 1세(KhsrowI, 531-579): 동로마(유스티니아누스 1세) 압박, 튀르크와 함께 에프탈 정복
-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지방에 왕족 출신의 총독 파견
- 중국(북위, 수, 당) 및 튀르크와 외교 관계: 에프탈 정복 이후로는 튀르크 압박
- 7세기 전반기 동로마 공격으로 국력이 약해진 사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
ㅇ사산 제국의 경제와 문화
- 기본적으로 농업, 해양 및 육상 교역로(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중국에 사신 파견)
- 학문의 중심지: 크테시폰, 레사이나, 군데샤푸르 – 그리스, 로마의 학문들을 계승
⦁ 6세기 초 동로마제국에서 아테네 아카데메이아를 폐교, 7명의 학자들이 사산제국으로 도피
사산 황제 호스로 1세의 보호를 받음
⦁ 호스로 1세, 인도의 유명 서적들을 페르시아어로 번역: 『판차탄트라』 → 『칼릴라와 딤나』
⦁ 의학, (그리스) 철학, 신학, 자연과학 등을 연구 → 이후 이슬람 학문발전으로 이어짐
- 다신교 사회(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 신봉
- 동로마, 중앙아시아, 중국의 영향을 받은 예술작품들
- 동로마 공격으로 우위를 점했으나 국력이 약해지면서... 이슬람의 등장으로 멸망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강력한 제국을 만들어 나가면서, 기독교 아닌 모든 지식을 쫓아냄
- 명맥을 잇고 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 철학자들을 다 쫓아냄
- 대부분 사산조 페르시아로 건너옴
-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작은 아랍어로 남게됨
- 12~13세기에 서유럽 사람들이 그리스어-아랍어-라틴어로 번역함
- 이슬람들은 이 당시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를 무시함
- 판차탄트라는 우화, 두 마리의 자칼이 여러 동물들과 엮어 나가는 이야기들
- 교훈적인데, 내용이 정치적임.
- 동로마-사산-굽타 / 오스만-사파비-무굴
2) 이슬람교의 등장
ㅇ아라비아 반도의 상황
- 7세기 초 사산 제국과 동로마 제국 간의 투쟁을 레반트-메소포타미아 교역로 불안정
- 아라비아 반도 서안과 홍해를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교역로 성장
: 아라비아 반도 서안의 도시들(메카)과 아랍 상인들 번영
- 상업의 발전(부의 축적) → 빈부격차 심화 및 아랍 부족들 간의 경쟁과 투쟁
- 상인 무함마드의 고민: 약자와 빈자에 대한 자선과 구휼, 부족 간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
ㅇ이슬람교의 등장: 새로운 유일신교
- 무함마드의 새로운 종교운동: 메카에서 기성 종교의 박해와 메디나로의 이동(헤지라, 622)
→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건설, 630년 메카를 시작으로 아라비아 반도 장악
- 이슬람(Islam): 유일신 알라에 대한 ‘절대 순종’을 의미
⦁오직 알라만을 신으로 인정: 삼위일체와 같은 복잡한 신학문제 발생하지 않음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음/ 단순하고도 일상적인 예배의식
⦁모든 신자들에게 선한 행위,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을 강조
⦁종교정치공동체의 임무: 종교의 전파(개종) - 모범적 행실과 감화를 통해
- 꾸란(‘읽다’의 동명사형): 무함마드가 말한 알라의 계시를 제자들이 기록한 것
⦁모세 5경, 시편, 신약성서를 신의 계시로 인정, 꾸란의 일부를 이룸.
⦁무함마드의 역할: 과거의 예언자인 아브라함, 모세, 예수와 충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과 동일한 메세지를 다시 전해주기 위해 등장 (예수도 무함마드도 인간).
→ 예수에 대한 평가: 가톨릭이 주장하듯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무함마드보다 앞선 선지자.
- 종교적 관용: “신앙의 문제에 강요란 있을 수 없다”(꾸란 2:256)
- 사산 제국 VS 동로마 제국 국경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짐
- 상인들이 리스크를 겪게 됨... 내륙으로 건너가는 게 아니라 바다로 돌아가기 시작함.
- 중간 기착점인 항구 연안 도시들이 발전하게 됨
- 각 도시마다 모시는 신이 다르고,, 분쟁이 많이 일어남...
- 교역/상업이 발전하면서 각 도시 내부에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됨
- 무함마드가 모두를 사이좋게, 가난한 사람도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 그게 이슬람
- 움마=교회라고 보면됨
- 시아파/수니파 경전이 문제가 아니라 후계자 문제
ㅇ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과 이슬람 세력의 성장
- 유라시아 해상 및 육상 통상망을 이용한 이슬람세력 급성장
→ 유목민의 통상 네트워크 + 개방적인 평등사상 → 이슬람의 대성공
- 초기의 이슬람 공동체: 움마 – 종교공동체로 시작, 점차 정치공동체로 변신
- 정통 할리파 시대 및 내전
⦁4명의 정통 할리파 시대(632~66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우마르 파(제국)와 알리 파(종교 공동체) 간의 갈등과 내전: 수니파와 시아파
→ 우마르의 가문인 우마이야 가문이 승리, 왕조 창건
- 아랍인이었고 정통 이슬람인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개종한 사람들을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
- 적이었는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 원년 멤버만 강조하면 시아파
3) 이슬람 제국의 성장
ㅇ우마이야 왕조(7세기 중반-8세기 중반)
- 인더스 강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변신
- 타종족, 타종교에 대한 차별적 포용
: 아랍인 무슬림, 비아랍인 무슬림, 비아랍인 비무슬림(유대인, 그리스도교도 등)으로 사회를 계층화, 차별적 세금정책 실시
- 레반트 지역을 중심 기반으로 삼음: 동로마 제국 정치 제도의 영향
- 비아랍인 무슬림의 수가 증가 → 무슬림 내에서의 차별 문제로 불만 가중, 반란 발발
- 우마르, 우스만 때 시리아 지역에 있었던 우마이야 가문을 인정하자
- 조카였던 알리는 아니다! 정통 아랍 이슬람, 아랍인 위주의 공동체로 가야된다
- 특히나 중요한 건 정치 공동체화 되어가니까 세속권력간의 관계
- 수니파: 정치 권력이 중요한 곳, 시아파: 종교 지도자의 권위가 더 센...
- 이란은 대통령보다 종교 지도자의 역할이 더 큼
- 수니파 시아파간의 내전으로 번지게 됨...
- 시아 알리: 알리를 따르는
- 시아파가 패하면서 동쪽으로 물러나게 됨
- 나머지는 우마이야 제국으로 성장하게 됨 - 이베리아반도까지 장악
- 비아랍인 무슬림들은 차별 대우...에 문제 의식 느낌
- 아바스 왕조 개창의 원인
ㅇ아바스 왕조(8세기 중반-13세기 중반)
- 750년 무함마드의 숙부 가문인 아바스 가문이 시아파의 도움으로 세력을 확장, 대제국 건설
⦁우마이야 멸망 후 제국질서 유지를 위해 수니파로 돌아섬, 시아파 탄압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바그다드에 도읍을 정함(페르시아적 성격): 페르시아인 등용
⦁아랍인과 비아랍인 간의 차별 철폐: 무슬림 내 만민평등 추구
- 탈라스 전투(751년): 신흥 이슬람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가 당군을 지휘
→ 보병 중심의 당군이 기병 및 지역세력의 도움을 받은 아바스 왕조에게 대패
⦁당의 패배: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이슬람에게 빼앗기게 됨
→ 이후 당은 안사의 난(안록산-사사명의 난) 발발하여 쇠퇴하기 시작
→ 포로로 끌려간 두환(杜環)이 경행기(經行記) 저술: 유럽 및 이슬람 세계를 당에 소개
- 8세기 후반-9세기 초 전성기
⦁할리파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 786-809), 알 마문(Al-Ma'mun, 813-833)
⦁중국의 제지술, 나침반, 화약이 이슬람으로 유입, 이후 서유럽에 전파됨
⦁학문과 예술의 번영: ‘지혜의 집’ - 종합적 교육 및 연구기관(수학, 천문학, 의학, 화학 등)
→ 사산 제국에게서 물려 받은 그리스 철학 수용, 이슬람 신학으로 발전시킴
→ 12세기 서유럽의 스콜라 철학(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침
⦁육상 및 해양 교역권 주도(지중해-인도양-동아시아/ 바이킹-사하라)
⦁『천일야화』: 「선원 신드바드의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등
ㅇ아바스 제국의 분열과 몰락
- 10세기 이후 지방 총독들의 봉기와 독립 선언으로 분열되기 시작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축소, 이후 종교 지도자로서 할리파 칭호만 유지,
⦁셀주크 제국 등의 보호를 받다가 1258년 몽골(훌레구 울루스)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함
- 후우마이야 왕조(756~1031): 구 우마이야 제국 후손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세력 유지
- 파티마 왕조(909~1171): 시아파로 할리파 칭호 천명,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 장악
- 사파르 왕조(861-903)와 사만 왕조(819-999), 부와이 왕조(932~1055)
: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흥망
- 아바스 왕조: 완전 페르시아 사람들은 아니지만 동쪽에서 온 사람들
- 탈라스 전투로 제지술 처음 전파된 거 아님 - 그 전부터 이미 전파됐음
- 하룬 알 라시다: 유명한 술탄, 전성기를 이끌었음
- 천일야화, 신드바드의 이야기 다 이때 지어짐
- 페르시아적 성격, 아랍인/비아랍인 구분 없앰
- 지혜의 집은 실체가 불분명하기는 함, 학자들의 공동체? 기관? 도서관?
- 번역 사업과 학문의 발전이 일어난 것은 맞음
2. 유럽의 두 제국
1) 게르만 왕국들과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
ㅇ게르만 왕국들
- 서고트 왕국(412-약 720)
⦁서로마 제국의 동맹 왕국으로 이베리아와 갈리아 지역 차지, 5세기에 영토 팽창
⦁6세기 초 프랑크 왕국과 충돌,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안달루시아 장악
⦁711년부터 우마이야 제국의 이베리아 정복 시작, 720년 경 몰락
- 동고트 왕국(493-553)
⦁동고트족이 이탈리아 정복(488-493), 오도아케르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탈리아 반도 장악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탈리아 통치권 부여받음
⦁553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공격으로 몰락
- 프랑크 왕국(메로베우스 왕조)
⦁서로마 제국 소멸 후 프랑크족 수장 클로비스 1세(Clovis, 재위 481-511)부터 왕국 형성
: 갈리아 북부 지역의 시아그리우스 세력을 몰아내고 왕국 팽창
⦁남진정책 및 영토 팽창: 부르군트 정복,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갈리아 서남부 획득
⦁영토 분할 상속에 따른 정치적 혼란, 왕권 약화
⦁궁재 권력의 상승, 강화: 카롤루스 마르텔(투르-푸아티에 전투, 732), 피피누스 3세
- 잉글랜드 7왕국
⦁5세기 중반 브리튼인들을 몰아내고 앵글, 색슨(작센), 유트 족이 정착, 7개 왕국 건설
: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 에식스, 서식스, 켄트, 이스트앵글리아
- 당연히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야만인들 취급받음.
- 유스티니아누스 때 반달 왕국, 서고트 왕국 모두 공격의 대상이 됨
-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기 전에 들어온 것아님 - 변경 지역에 있었음
- 서로마 제국 형성 이후 팽창하기 시작함. 그 전에는 벨기에 지역에 있었음.
- 프랑크 왕국의 첫번째 왕이 라틴어로 클로드베쿠스, 프랑스어로 클로비스
- Chlodobecchus = Clovis - 루도비쿠스 - 루도비쿠- 루이(lovis)
- 메로베우스는 뭔 뜻일까? 왕조 이름 붙일 때는 첫번째 왕의 아버지 이름
-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 오토, 하인리히 1세 아빠도 오토...
- 클로비스 아빠는 힐데리쿠스... 메로베우스는 몇 대 앞에 있는 부족장
- 너무 자랑스러워서 왕조 이름.. 로마한테 인정받은 첫번째 부족장, 같이 훈족에 맞서서 싸웠음
- 영어로 되어 있는 수많은 지명, 인명은 불어에서 온 거
- 프랑크 왕국이 정치 공동체 느낌이 아니라 부족 느낌
- 그래서 사망 후에 갈라 먹구 그러구...
- 약육강식의 시대, 매드맥스
- 전사, 기사 등 세력은 잔인하고 포악함
- 국가라는 개념이 없으니 국상이라는 말도 못 씀 - 재상
- 브리타니아 사람들(켈트족) - 앵글로족, 색슨족, 유트족
ㅇ유스티니아누스(Iustinianus) 황제(재위 527-565)
- 기독교의 배타적인 국가종교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 → 로마기독교의 황제숭배 유지
- 헬레니즘적인 전제적 군주제를 지향 → 532년 니카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
- 537년 성 소피아 성당 개축, 『시민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 종합
- 대토지 소유 귀족들의 토지소유 제한, 소규모 경작자 보호
- 지중해 주변 영토회복 원정 → 영토유지 어려움, 재정적 출혈과 정치적 불만만 가중시킴
- 유스티니아누스는 농민 출신, 큰아버지가 아들 없어서 양자로 보내짐..
- 양아버지가 말단 군인에서 장군까지 간 사람
- 그러면서 고위층으로 진입한 사람...
- 신분이 낮을 때 사귀게 된 여자가 테오도라. 서커스단 무희...
- 일반 평민보다도 신분이 낮은 여자인데 결혼해서 황후까지 감...
- 보통이 아닌 사람들
- 빵과 서커스:
- 서커스=키르쿠스, 전차 경주
- 기독교적으로 향락/퇴폐를 막아야 함
- 기독교적 윤리 정착, 향락에 들어가는 돈 아낀다 목표 2개로 빵과 서커스 제도 폐지
- 훌리건 같은 관람객들 중심이 봉기를 일으킴: 니카의 봉기
- 황후가 어딜 가냐 너 황제인데... 굴복하는 척 하면서 다시 한번 전차 경주 열어서 문을 잠구고 다 죽여버림...
- 재정을 비축해서 지중해 지역으로 원정을 떠남 - 최대 영토 확보
- 유스티니아누스
-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활용함
- 기독교 이외는 박해하고, 관습들 철폐하면서 ex) 전차 경주
- 황실 재정도 확충하고, 반대파 제거하고, 대외 팽창에 활용함
- 로마는 다시 로마 제국의 아래에 있게 됨
- 카르타고 지역에 있던 왕조가 봉기를 일으키면서 왕위 찬탈
2) 동로마 제국의 변화
ㅇ헤라클레이오스 왕조(610-711): 동로마제국의 그리스적 정체성 강화
- 새로운 행정체제 테마(thema) 제도 등장: 군대를 중심으로 한 지방의 군관구제
⦁군역을 담당하는 자유소농 증가/ 비용이 많이 드는 외국용병제 청산
⦁끊임없는 외침에 맞서 전쟁에 준비되어 있는 사회로 전환
⦁622년부터 사산 제국(224-651)의 공격을 받음, 영토 상실(종교전쟁의 성격)
⦁650년경부터 이슬람 세력 성장, 영토상실 → 동로마 최대의 위협세력으로 성장
- 동로마제국의 그리스적 정체성 강화
⦁공식 언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전환
⦁기독교(동방정교회) 제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인들의 민족감정 형성
- 이슬람이 팽창하고 있을 때 -> 동로마 제국의 수축
- 동로마제국의 그리스적 정체성 강화
- 이슬람한테 땅을 다 빼앗김, 발칸 반도만 남음
- 발칸 반도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씀. 그리스어 중심의 정치체로 넘어감.
- 군대를 따로 주둔시키는데 군대한테 일일이 비용을 지불할 수 없으니 땅을 나누어줌
- 평상시에는 자영농으로 지내다가 전시에만 군대로..
- 로마 시대 시민군 체제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변형된 체제
- 자유 소농들이 증가해 나가고 땅을 바탕으로 군대도 이루는 그런... 시스템
- 이렇게 해서 외국에서 용병 들여오는 시스템을 청산하면서 비용 절감함
- 동아시아에는 용병 개념이 없음
- 나중에 15세기 이탈리아/백년 전쟁 가면 다 용병들...
- 화폐 경제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임, 쌀이 아니라 화폐로 받으면서 살 수 있는 시장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
- 우리나라 역사가 특이한 역사. 화폐 제도가 많이 발전하지 않았음. 우리 나라 역사를 기본으로 생각하면 안 됨.
- 물론 완전히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는 없음. 자본주의가 '있는' 사회
- 지금까지의 세계는 자본주의가 있는 세계. 왕/황제가 자본ㅇ ㅔ맞추어서 통치하는 세계는 15~16세기에 서유럽이 본격적으로 시작함.
- 우리나라는 끝까지 이 시스템에 맞섬. 그걸 깨는 첫번째 왕이 고종...
- 외국에서 돈 빌려서 무기 사느냐? 유럽은 옛날부터 이랬음...
- 16~17세기 가면 루이 14세, 네덜란드에서 돈 빌려서 스웨덴에 대포쏨...
- 인생의 목표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님. 각자의 기준대로 살아야지!
- 동방정교회가 정통임
- 여기서 갈라진 게 로마 총대주교 - 동로마 제국 황제한테 굴복 안 할래
- 정식교회라는 뜻
- 가톨릭이라는 말은 삼위일체론, 예수의 성육화,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걸 다 가톨릭이라고 함.
- 그리스어로 까톨릭꼬스 - universial 이라는 뜻
ㅇ동로마 제국의 성상파괴 논쟁
- 성상파괴 논쟁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인 투쟁관계에 돌입: 종교를 통한 정치적 정체성 강화
→ 새로운 일신교 이슬람에 대해 종교적 순수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대두
⦁논쟁의 초점: 초월적 존재의 감각적 가시화 가능 여부 → 유대교 전통과 헬레니즘의 충돌
⦁신학논쟁이 파벌 간 정치투쟁으로 발전
⦁로마 총대주교가 동로마 황제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명령을 거부
- 이레네 황후의 정변(797)과 성상파괴 철회
: 로마 총대주교는 여성의 제위계승을 불인정, 카롤루스를 황제로 즉위시킴
- 종교 문제는 곧 정치 문제
- 세자르 파 피젬
- 황제가 최고 권력을 가지면서 교회 역할을 함 - 황제교황주의
- 황제 밑에 총 대주교
- 원래 로마때부터 그랬는데 뭘...
- 왜 갑자기 성상파괴 논쟁? 왜 갑자기 성상을 파괴하자고 할까?
- 찾으면 나오는 거 아는 게 뭘 공부한 거냐... 나무위키 본 게.... 사료를 봐야 역사 공부지....
- 성상을 파괴해야 될 것만 같은 느낌... 왤까? 성상이 없는 애들이 더 잘나가니까.
- 같은 여호와를 믿는데, 성상을 믿지 않는 애들이 더 잘나감 - 이슬람
- 우리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나보다... 이슬람은 아라베스크 무늬나 아랍어만 있지, 어찌보면 동양적이기도 함...
- 헬레니즘 전통이었던 것. 보여주는 것이.. 그게 서유럽의 전통
- 이레네 황후: 성상 파괴 반대
- 아들 끌어내리고 감옥에 가둔 다음에 눈을 멀게 함... 친엄마 맞음... 살려는 드릴게...
- 최소한의 가시화, 이미지화 - 이콘화
- 눈도 멍 때리고 있는,, 초점도 안 맞고. 예쁘게 그리고 이런 거 없음....
- 멋있게 예쁘게 그리지 않음
ㅇ8-9세기 대내외 위기와 극복
- 8세기 초부터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정치적 혼란과 외세 침입(이슬람, 랑고바르드인, 불가르인)
- 10세기 이후 영토 회복과 국력 강화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쇠퇴로 동부 영토 회복: 소아시아 및 레반트 지역, 불가리아 정복
⦁동부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 유지
⦁동부 지중해 교역로 장악, 베네치아가 이에 편승하여 발전
- 문화의 발전: 동로마 예술의 제2황금기
⦁건축, 회화, 모자이크, 수공예, 그리스어 법전 편찬 등
⦁성상파괴 철회, 최소한의 성상 제작 허용
⦁키릴 문자 고안, 동유럽 지역에 기독교 전파(키예프 공국을 기독교로 개종시킴)
- 10세기 이후 아바스 왕조가 분열되니까 비잔티움 제국 회복함
-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 멸망하면서 각 제국에 정교회가 남게 되는 것
3) 카롤루스 제국의 흥망
ㅇ카롤루스 제국의 성립
- 궁재 피피누스 3세(Pippinus III, 714~768)의 정변
⦁메로베우스 왕 강제 퇴위시킨 후 스스로 즉위
⦁로마 총대주교(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 재위 752~757)의 승인(교황령 획득)
→ 동로마 황제의 간섭과 성상파괴 지시에 대한 저항, 랑고바르드인들의 로마 위협과 관련하여 피피누스 3세가 로마 총대주교를 지지, 방어
-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 재위 768~814): 대외 정복으로 영토 최대 팽창
⦁799년 로마 총대주교 레오 3세(Leo III)를 혼란스러운 폭력사태에서 구조, 이탈리아 평정
⦁800년 레오 3세가 카롤루스 마그누스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
→ 당시 동로마 제국 황후 이레네(Irene, 재위 797~802)의 황위 찬탈을 배경으로 함
: 이레네는 성상파괴 정책을 철회, 그러나 레오 3세는 이를 기회로 독립화 추구
⦁교권과 속권의 대립 시작: 카롤루스 마그누스 또한 교회가 제권 아래 복속되어야 한다고 생각
- 피피누스 별명은 브레비스, the short. 키가 작아서
- 아들은 190cm이 넘음... 카롤루스 마그누스...
- 유럽사에서 키가 제일 큰 사람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204cm...
- 프랑수와 1세 194cm 그 다음이 카롤루스 마그누스
- 콘스탄티누스 기진장과 관련되는 사건 - 교황령 획득
- 이탈리아 통일의 최대 걸림돌
- 무솔리니가 교황령 다시 돌려줌. 보수적인 가톨릭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 마그누스한테도 형제가 있었음. 아들들이 분할 상속해야 한다는 지배자들의 고정 관념. 근데 동생이 먼저 죽어서 아버지가 물려준 땅 전체 장악함.
- 카리스마 장난 아님, 잘 싸우고, 키도 크고...
- 카롤루스 마그누스: 피레네 산맥 넘어서 가려고 하는데, 공격 받으면서 쇠퇴함 - 롤랑의 노래
- 작센 족이 이때 반란 일으키는데 엄청 나게 탄압함
- 작센족이 프랑크족에 대해서 기분이 어떨까...?
- 작센족 일파가 넘어간 게 앵글로 색슨 족
- 로마 총대주교가 sos -> 정리해주고 가려고 하는데 -> 성탄절까지만 있다가 가... -> 황제 즉위식 서프라이즈~
- 근데 끝나고 나서 기분이 나갔음. 교회 문을 뻥 차고 나감.
- 황제 밑에 로마 총대주교
- 로마 형식으로 할 줄 알았음....
- 자기가 도와준 애가 자기한테 무릎 꿇으라고 하고 관을 씌워줌.
- 로마 전통은 자기가 자기 관 쓰는 거...
- 죽을 때 돼서는 자기 아들 대관식을 열고 카롤루스가 대관식 거행함. 카롤루스가 관 씌어줌
- 교회는 스스로 제국이 되려고 하고,,, 제국은 교회를 제국의 교회로 만들려고 하고...
- 카롤루스 아들들은 전쟁 나가서 다 죽고 루도비쿠스 하나만 남음.
- 아버지와 다르게 팽창하지 않고 영토를 지키려고 함..
- 칼로 하는 게 아니라 글/펜 쓰는 사람들이 필요함 - 성직자
- 친성직자 정책을 펼침..
- 전쟁을 하지 않으니까 아들들이 다 살아남음
- 각 지역에 파벌 형성 - 장자인 로타리우스에게 제국을 물려주려고 했더니 둘째, 샛째가 반발
- 루도비쿠스 죽고 나서 맏형에 대해 둘째와 셋째가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킴.
- 로타리우스는 동생들한테 땅 뺏기고 먼저 죽었는데, 로타리우스 아들들이 또 나눠먹음...
- 미어스 조약 (메르센 조약)
- 동프랑키아에서 먼저 대가 끊김.. 왕을 선출함..
- 마자르족(헝가리)이 쳐들어옴
- 훈가리 - 훈족
- 헝가리 대사관 가면 마자르라고 써있음
- 제일 잘 싸우는 제후를 왕으로 선출함 - 작센 공
- 인민들의 땅 - 도이칠란트 people land
- 독일 - 도이찌 / 왜 우리는 독일이라고 할까? 도이칠란트로 바꾸자고 했는데 안 바꿈... 일제 청산은 왜 안 함...
- 위그의 별명이 카페
- 수도사들이 쓰는 후드 달린 모자를 씀
- 신실한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옷을 입고 다닌 거
ㅇ카롤루스 제국의 위기와 새로운 질서의 등장
- 9세기 후반 제국 단일유지파와 분할상속파 간의 대립: 분할상속파의 승리
→ 제국의 분할 심화(베르덩, 메르센 조약 등): 동프랑키아, 이탈리아, 서프랑키아
- 이민족의 침입
⦁9세기 후반 서프랑키아와 잉글랜드: 노르만인들의 약탈
⦁10세기 전반기 동프랑키아: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인 마자르족의 침입
- 서유럽 이민족들의 정착과 세력 변동
⦁마자르족: 쇠퇴해 가는 아바르족을 흡수, 10세기 기독교 수용, 헝가리(마자르) 왕국 수립
⦁노르만족: 잉글랜드 데인로 형성 → 통일 잉글랜드에 흡수/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
⦁노르망디 공작 기욤(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노르만 왕조 시작
⦁노르망디 오트빌 가문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이슬람 및 동로마 세력 축출), 양 시칠리아 왕국
ㅇ제국의 소멸: 탈 중심적 지방분권화
- 현실적으로 왕들은 다른 제후들이 다스리는 지역들에까지 통치력을 뻗치지 못함.
- 제후들: 각 지방 실권자로서 과거 카롤루스 왕조의 지방관들의 후손.
∙왕에게 충성서약을 하긴 하지만, 왕의 권력을 무시
∙토지와 서약의 교환을 바탕으로 지방 귀족들을 세력권 내에 끌어들임
➔ 각 지역별 개별주의에 입각 : 서로 다른 언어, 문화, 부족주의 등을 유지
- 서프랑키아: 파편화 과정이 가장 심화됨
- 동프랑키아: 제후령, 도시국가 단위에서 파편화 과정이 멈춤
- 바이킹을 왜 바이킹이라고 할까? 비킹이라고 안 하고?
-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는 비킹이라고 부름
- 영어만 그렇게 읽음...
- 분산화, 파편화 과정이 심화됨...
3. 서유럽의 권력 분산화: 특수한 역사적 경로의 시작
1) 동프랑키아: 작센 왕국에서 신성로마제국으로
ㅇ동프랑키아의 영역제후령: 카롤루스 왕조의 공권력 약화 및 영역제후령으로의 지방분권화
ㅇ동프랑키아 왕 선출
- 작센 하인리히 1세: 918년 제후회의에서 슬라브 및 마자르족 방어를 위한 지도자로 선출됨
- 오토 1세(912-973): 936년 즉위, 10세기 서유럽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동부 슬라브족과 마쟈르족을 몰아내고 영토팽창 → 동프랑키아 내 패권 장악
⦁제국 내 교회 및 성직자에 대한 지배권 확립
ㅇ신성로마제국의 성립(962년)
- 오토 1세가 교황 요하네스 12세의 적대세력들을 물리치고 962년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
- 곧이어 황제와 교황 간의 충돌
⦁교황: 오토 1세의 힘을 빌어 교황권을 확립하고자 함
⦁오토 1세: 황제로서 교회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함 → 제국 내 교회에 대한 개입 심화
-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을 회복하지는 못함. 동프랑키아를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 건설.
: 현실적으로는 동프랑키아의 왕,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로마제국의 계승자
→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 간에 벌어지게 될 지속적인 갈등의 요인이 됨
2) 서프랑키아: 카페왕조의 등장
ㅇ카롤루스 왕조와 로베르 가문
- 카롤루스 왕조와 로베르 가문 간의 왕위 교대 동안 서프랑키아 왕권은 급속도록 약화
- 위그 카페 (939-987-996): 987년 대귀족들이 서프랑키아 왕으로 선출
→ 오토 왕조의 비호 아래 등장한 정당성 약한 왕, 왕령지 협소
- 동프랑크의 분권화, 분산화,
- 하인리히 아빠가 작센공 오토
- 로마 총대주교가 작센공 오토 2세에게 니가 강력하니까 황제가 될 것 같다! 그게 신성로마 제국
- 동프랑키아에 대한 패권 장악 - 프랑스쪽으로 나아가지 않음
- 물론 카페 왕조가 왕으로 선출되는 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게 동프랑키아이기는 함. 사돈 지간이니까.
- 황제로서는 오토 1세. 첫번째 오토 황제니까.
-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지방 세력 중 하나일뿐임.
- 교황이 파문하면 다른 세력이 몰려들어 함께 공격하면 당해낼 재간이 없음
- 교황이 스스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파편화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교황권이 강할 수 밖에 없는 것
ㅇ봉건사회(feudal society)의 등장
- 봉건제(feudalism): 제도가 아닌 정치적 경향성 (≠ 周나라 封建制, 일본 봉건제)
⦁정의: 충성과 봉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들 간의 쌍무적 계약관계
⦁전형적인 봉건제의 범위: 라인강 이서, 루아르강 이북 (이외 지역에서는 유사한 인적관계들)
⦁극도로 파편화된 정치권력 상황에서 생겨난 정치적 경향성
→ 왕부터 하급기사까지 주종관계로 엮여지지만 왕권은 유명무실
- 영주제: 자유민과 예속민(농노) 사이에 맺어진 일방적인 지배관계
- 사회적 관계가 추상적인 제도나 권위가 아닌 직접적인 인간관계에 의해서만 유지됨
⦁각 지역의 제후와 왕은 끊임없이 자신의 영토를 여행하며 스스로를 보여주고 신뢰를 획득
ㅇ봉건제의 복잡다단화
- 주종관계의 복수화: 한 명의 종신이 여러 신서를 통해 여러 토지를 불연속적으로 보유
- 종신은 봉토의 세습(토지 확장 및 보전)이 목적, 충성의식 약화
- 최우선 신서(hommage lige) 고안 (1046년 처음 등장)
→ 세습과 의무 이행등과 관련된 여러 현실적 문제들 속에서 전 지배계층 내에 다양한 세력들
간의 투쟁이 방임됨/ 사회지배세력에 의한 사회 위계화 또는 체계화가 어려워짐.
ㅇ사회적 체계로서의 봉건제
- 상업의 부활: 영주의 통치 아래, 또는 영주의 간섭 바깥에서 교역이 되살아남.
- 봉건사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
- 13세기 이후의 2차 봉건제: 투쟁상황 정리, 왕권 강화 → 수직적 상하관계 구축되기 시작
- Feudalite가 왜 봉건제임...
- 제도가 아니라 경향성인데 왜 봉건제임??? 정치 질서, 권력망일 뿐
- 제도 시행한다고 먹힐 때도 아님...
- 인류학자 중에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음 order anarchy 질서있는 무정부 시기
- 철저한 계약 관계, 계약보다 더 중요한 건 2~3명의 주군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음
- 가장 중요한 게 최우선 신서가 있느냐는 거
- 땅을 더 주고 계약을 맺음
- 다른 주군들이랑 싸울 때 나를 먼저 도와줘
- 자유민들간의 쌍무적 계약관계
- 자유민: 귀족,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
- 영주제, 농노제, 장원제는 다른 것.
- 서로 호혜적인 관계처럼 나오지만 기만적인 것. 농민 위로는 쌍무적 계약간의 관계
- 농민과 귀족은 그렇지 않음. 기만적임.
3)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통일과 덴마크의 지배
ㅇ잉글랜드의 통일
- 데인족(바이킹)의 저항과정 중에 통일의 기틀이 마련됨
- 웨식스의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71-899): 데인족 침략 방어
- 웨식스-머시아의 애썰스탄Aethelstan 왕(924-939): 최초의 통일 잉글랜드왕(927년)
- 데인로(Danelaw)설치: 데인족의 정착, 고유의 법과 습속 유지
ㅇ능률적인 통치제도 조직
- 충분한 왕실재정/ 행정기록의 등장(writ와 상서국)
- 각 주(shire)에 주 통치관(sheriff) 임명
- 위타나게모트(Witanagemot): 고위 성직자, 대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 – 국왕 자문 및 선출
ㅇ11세기 초 데인족의 점령과 앵글로-색슨 왕위 문제
- 덴마크왕 크누트(Knut, 1016-35)의 잉글랜드 점령, 해상제국 건설
- 크누트 사후, 위탄회의는 알프레드 왕의 후손인 에드워드 고해왕(1042-66)을 왕으로 선출
- 에드워드 사후 후계를 두고 두 세력이 대립: 위탄 회의에서 선출한 웨섹스 공 하롤드(Harold)와 에드워드의 외가 후손인 노르망디 공작 기욤(Guillaume, William)
- 7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졌다가 바이킹이 쳐들어오면서 몇 개가 무너짐
- 노르만인들이 정착해서 데인로를 만들음
- 웨식스에 흡수 통합됨 - 통일된 잉글랜드 왕국이 만들어졌는데
- 덴마크에 있었던 크누트라는 사람이 다시 쳐들어옴
- 덴마크-잉글랜드 통합 왕국
- 웨식스 왕조 출신의 에드워드를 왕으로 선출함
- 동프랑키아/서프랑키아에 비해서 잉글랜드 지역은 통합성이 높음
- 에드워드가 죽고 나서 아들이 없었음. 다시 한번 문제가 생기게 됨.